묵상자료 4140.

시편 34:5-8.

찬송 40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멸치 배가 포구에 닿으면, 선원들은 그물을 잡고 탈망 작업에 들어갑니다. 특유의 구령에 맞춰서 오른 손 왼 손을 번갈아 당겨서 멸치를 털어내지요. 한 번 하게 되면 보통 4시간 가까이 지속되는 이 탈망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작업입니다. 1.4km짜리 그물을 다 털어내려면, 한 나절을 팔다리에 피가 몰릴 정도로 버텨야 하지요삶은 이렇게 우리에게 가혹한 몰입을 요구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길을 잃어버릴 때보다, 길이 우리를 잃어버릴 때가 더 많은 데 말이지요. 그러니 잘 가고 있구나, 잘 버티고 있구나!”, 이렇게 나 자신을 다독일 사람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아닐까 합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12629일 방송>

 

2. 지난 달 농아인 목회자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몇 분의 목회자들이 어눌하지만 말씀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곤 듣지 못해서 말을 못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말할 능력은 있지만 들리지 않으니까 말까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듣지 못하는 이를 고치신 우리 주님은 침묵명령을 내리십니다. 왜 침묵명령을 내리신 걸까요?

 

소문이 나는 걸 원치 않으셨을까요?(31-36).

예나 지금이나 난치병을 고치는 일은 사람들에게 가장 주목을 받는 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두 해전 구당 김남수 옹의 침술강의나 시술 장면은 TV시청률을 최고로 높였고, 지금도 암과 관련된 특강은 인기를 끌고 있는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소문을 내고 돈을 들여서라도 선전을 합니다. 그 목적은 유명세를 얻어 더 많은 이득을 얻으려는 속셈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찌하여 침묵명령을 내리신 것일까요? 요한복음서 기자는 소문이 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러면 그럴수록 소문이 더 나게 되었다고 그 후에 진행된 이야기까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서 기자들의 해석처럼 정말로 소문이 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걸까요? (8:4, 9:30, 5:43)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너무 유명해지면 불필요한 오해를 받게 마련이고, 자칫 주객이 뒤바뀌는 현상도 생길 수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메시야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배려일 수 있습니다.

구약의 메시아 신앙과 지상의 예수님을 연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해될 수 없기에, 이런 침묵 명령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합니다(W. Wrede, W. G. Kummel). 물론 제자들의 몰이해를 강조했던 것도(4:40-41, 6:52) 같은 이유에서라고 주장합니다.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적들을 지켜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는 등 헛된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다른 치유이야기는 아무런 침묵 명령 없이 전해지고 있는 점은 모순된다고 말입니다(W. Marxen). 모든 치유 기사가 동일한 구조나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침묵 명령은 메시야 비밀을 깨닫기까지는 필요한 주제였음은 충분히 이해되는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화육(化肉)하신 주님을 인간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여유가 없기 때문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야만 가능한 일일 테니 말입니다.

 

우리에게 침묵 명령은 어떤 의미입니까(37).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병자를 고치신 사건에 대해서, 소문을 피하고자 침묵 명령을 내리셨는지, 아니면 메시야 비밀을 유지하려는 뜻이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모두 의미가 있는 해석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침묵 명령을 하신다면 말입니다. 문둥병을 포함해서 온갖 난치병들을 말씀으로 고치시는 놀라운 사건 앞에서 우리에게 침묵 명령을 내리셨다고 할 때 말입니다. 저는 종종 기적이라는 말을 정의할 때, 하나님의 현실참여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일이 바로 기적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조용히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게 무엇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재발견입니다다시 말하면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고 말입니다. 성경을 읽는 자리에, 설교가 선포되는 자리에, 성찬이 시행되는 그 곳에, 우리 주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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