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569호.
시편 9:1-3.
찬송 41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거목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천하를 호령하는 벼락이 아니라, 나무속에 사는 조그만 딱정벌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송길원의 <비움과 채움> 중 일부분인데요.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작은 딱정벌레가 들어앉아 있으면, 내 마음이 먼저 조각나고, 마침내 상대방의 마음도 부서지게 되지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18년 3월 8일 방송>
2. 부활절 넷째 주일의 복음서의 말씀 요 10:22-33을 본문으로 “소통과 불통의 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요즘 대 기업에서는 머리가 좋은 사람(IQ-지능지수), 마음이 따뜻한 사람(EQ-감성지수)을 선호한다는 얘기는, 인간을 상대로 하는 직업은 머리보다 마음의 소통에 큰 기여를 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통이 안 되는 원인 중의 하나는 상대에 대한 상한 감정 때문일 수 있습니다(22-24절).
요즘은 선명한 TV 화면을 통해서 국회에서의 청문회나 헌법 재판소에서의 판결 등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종종 앞뒤가 꽉 막힌 그런 인사들을 보면서 답답해 할 때가 있습니다. 고성을 지르는가 하면 삿대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화를 낼 수 있지만 품위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소통의 기술 혹은 대화의 기술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생각합니다. 소통과 불통은 매우 상대적이라고 합니다. 평소에는 귀담아 들을 줄도 알고 여유 있게 말을 하던 사람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상대할 때는 매우 전투적이고 심지어 억지까지 부립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대할 때, 꼭 그와 같았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소통이나 대화의 기술을 운운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에 대한 상한 감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계냐에 따라서, 소통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25-28절).
대화의 철학자 마틴 부버는 “나와 너의 관계를 인격적 관계”라고 하고, “나와 그것의 관계를 비인격적 관계”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인격적인 관계여야 할 인간들 사이가, 때로는 비인격적인 관계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소통과 불통의 문제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하십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는 서로를 잘 아는 관계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말은 겉으로 들어난 모습이나 목소리만이 아니라, 서로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꿈꾸는지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함께 나눈 기쁨과 슬픔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일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대화는 막힘이 없습니다. 몇 년 만에 만나도 어제 얘기를 잇듯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타인들의 대화는 냉랭하고 겉돌기만 합니다. 중환자를 심방할 때, 스테레오 타입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얘기할 수도,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이해하려고 힘쓸 때 소통의 기적이 찾아옵니다(29-30절).
피를 나눈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서도 불통의 관계가 있는가하면, 처음 만난 사이에서도 소통의 기적이 있습니다. 저의 교우 한 분은 자신의 형님 때문에 늘 힘들다 말했습니다. 불통의 이유는 자기 생각만 앞세우는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선교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분은 저의 몽골 지도자 세미나에 동행했던 미국 선교사인데, 4일 동안 제 강의를 맨 앞자리에서 들으셨는데, 영어는 한 마디도 없고, 한국어와 몽골어만 사용되고 있었는데도, 지루해하지 않고 끝까지 참석했습니다. 강의 개요를 번역해 드린 게 전부인데 온갖 상상력을 보태서 이해하려고 힘썼을 것입니다. 아침 산책에서 그 얘기를 꺼내자 자신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소통은 꼭 말로만 가능한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소통은 상대를 이해하려고 힘쓸 때는 언제든 가능합니다. 소통은 기쁨과 감사를, 불통은 오해와 분쟁을 만듭니다.
3. 필립핀 농인 선교팀(농인 4명, 정상인 4명)이 무사히 도착 선교활동을 시작하셨다고 우슬초 목사님께서 알려왔습니다. 복음이 많은 필립핀 농인들에게 전해지는 은총이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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