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59호(2012. 10. 5. 금요일).
시편 37:23-27.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루살이는 참 오해를 많이 받는 곤충입니다. 강이나 하천을 걷다보면요, 어떻게 생겼는지도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은 작은 곤충들이 얼굴로 마구 날아드는데요. 하루살이로 알고 있지만 하루살이가 아니라 깔따구입니다. 하루살이는 깔따구보다 훨씬 커서요, 한 1cm 삼각형 모양으로 두 쌍의 날개와 또 두 세 개의 긴 꼬리를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루살이에 쓰인 오해는 해충이라는 점인데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긴 하지만 해충은 아닙니다. 2급수 이상의 수질에서 유충으로 서식하는 수질 지표종이니 하루살이를 볼 수 있다는 건 오염되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이지요. 그런데 이름이 하루살이. 하루살이는 정말 이름처럼 하루만 살까요? 저녁에 하루살이가 떼 지어 날아다니는 건, 하루살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비행입니다. 하루살이의 수컷들은 황혼 무렵에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라서 큰 무리를 지어 군무를 짓는데요. 바로 이때 암컷이 군무 속으로 뛰어들어서 직선으로 날아가면, 수컷이 잡아서 멀리 날아가 혼인 비행을 합니다. 그런 후에 평균 1,500개에서 3,000개가량의 알을 낳는데요. 물 표면에 떨어트리는 종부터, 일부러 물속에 들어가서 알을 숨겨놓는 종까지 아주 다양하지요. 그리고 하루살이는 이렇게 산란을 한 후에 바로 죽습니다. 단 하루 동안 관혼상제를 다 치루는 격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살이가 결코 하루살이가 아닌 까닭은요, 하루살이가 나은 알이 유충이 돼서 물속에서 사는 기간이,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유충은 10번에서 30번에 걸쳐서 탈피를 한 후, 주로 봄에서 여름 사이에 성충이 됩니다. 그런데 성충에게는 입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먹지 못한다는 얘기지요. 오래 살래도 오래 살 수가 없습니다. 물속에서 2-3년을 애벌레로 살다가, 겨우 껍데기를 벗고 성충이 돼서 물위로 날아올랐지만, 주어진 시간이란 짧게는 1시간 길게는 2-3일. 매미보다 더 기가 막힌 생을 살다가는 곤충이 하루살이였습니다. 하루살이를 하루살이라고 하는 건 어디까지나 성충으로써의 삶이고요. 그 전체의 삶으로 보면 결코 하루살이가 아니었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7월 19일 방송>
2. 대입시험을 준비할 즈음, 저의 중학교 은사님께서 제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설명해 볼 수 있느냐?” 고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선생님은 그 질문을 하신 몇 년이 지난 후, 제게 주님을 믿고 있다고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그 때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답게 사람이 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행하셨다고 열을 내서 소개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그 기적의 현장을 수없이 목격하였던 바로 그 사람들조차도 주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나, 날 때부터 시력을 잃은 장애자를 침을 뱉어 이긴 진흙을 발라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을 본 사람들도,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한 그 장면을 바라본 사람들도 믿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거기엔 한 가지 까닭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깨우쳤거나 성령께 받아 알게 된 진리였습니다.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던 분”이 계셨다고 말입니다. 믿음에 이르는 길, 믿을 수 있게 되는 비결은, 여러분이나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신변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도 아니었고, 알 수 없는 강한 바람 같은 힘에 이끌려서도 아니었습니다. 솔직하게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말씀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매일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지식인들 가운데도 믿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침묵하는 믿음을 가졌다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사람들이라고 설명을 붙였습니다. 그러니까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언제든 조그만 바람에도 날아가버릴 약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입니다. 훗날 베드로가 취했던 바로 그 자세의 믿음 말입니다. 풍랑 앞에서, 삼엄한 분위기 앞에서 언제든 사그라지는 그런 부끄러운 믿음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 히 18:1-11. (0) | 2019.05.12 |
---|---|
구원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 요 12:44-50. (0) | 2019.05.12 |
아직 더 배워야 할 기도의 범례. / 요 12:27-36a. (0) | 2019.05.12 |
예수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 : 그리스도인. / 요 12:20-26. (0) | 2019.05.12 |
우리의 왕은 초라하셔야 합니다. / 요 19:9-19. (0) | 2019.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