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288호 (2013. 2. 11. 월요일).
시편 시 71:9-12.
찬송 44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가 되거나 설날을 맞으면, 사람들은 “복 많이 받으라.” 이런 덕담을 주고받는데요. 줄 수 있다면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다면 받고 실은 복. 이 단 한 음절의 단어에는 참으로 다양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옛날에는 덕담과 함께 그림을 선물했는데요. 주로 민화였어요. 민화는 예술품으로써의 가치보다는 나쁜 액운을 쫓고, 복을 불러들이고 싶은 주술적인 의미가 큰 실용화였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민화 한두 점씩 걸어놓곤 했는데요. 어떤 민화를 보면, 어떤 복을 소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잉어가 위로 뛰어오르는 그림을 많이 봤던 것 같은데요. 속뜻을 모를 때는 왜 딱히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잉어일까? 고개를 갸우뚱했었는데요. 알고 보니 자식이 장원급제하거나 출세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기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간혹 잉어가 아니라, 쏘가리를 일 때도 있는데요. 쏘가리를 뜻하는 한자, 궐자의 발음이 궁궐의 궐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궁궐에서 일하게 해 주세요. 즉 출세하게 해 주세요, 라는 뜻이 되겠지요. 그런데 물고기가 한 마리가 아니라, 짝지어 노는 그림도 있습니다. 이런 그림은 주로 신혼부부 방에 걸었는데, 물고기는 한 번에 수천 개씩 알을 낳으니까,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음이었겠지요. 석류도 마찬가지로 다산을 상징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식이 부모에게 만수무강하세요. 하는 마음으로, 선물하는 그림도 있습니다. 바로 장생도입니다. 여기에는 바다와 산 돌이 등장하고, 거북이와 사슴 학과 같은 동물들, 또 복숭아와 영지버섯이 등이 등장하는데, 이런 동식물들은 모두 천년을 산다고 믿었던 것들이고, 바다와 산 돌은 영원함을 상징하는 것들이었지요. “부자 되세요.” 하는 덕담을 담은 그림도 있습니다. 모란도입니다.
옛날에는 모란이야말로 꽃 중의 꽃, 가장 크고 가장 화려했기 때문입니다. 꼭 모란이 아니더라도요, 꽃에 새가 더해 진 화조도는 받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되고, 부부에게는 한 평생 사랑을 이어가길 기원하는 것이 되고, 또 재산을 모으고 높은 벼슬에 오르길 바란다는 뜻도 담겨 있는데요. 이 때 꽃이 많으면 많을수록 부귀가 더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란도 병풍이 많은 사랑을 받았지요. 재미있는 건 민화에 수탉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수탉의 벼슬이 벼슬길에 오른다 할 때의 이 벼슬과 발음이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돈 많이 벌고, 출세해서 부귀해 지고 부부금술 좋고 자식 잘 되고.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바라는 복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원래 복이라는 건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인간의 의지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요. 그러나 “한국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복을 빈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사물과 수많은 말 속에 상징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해서든, 나와 우리 집안에 복이 들어오도록 하고 싶었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의지의 반영, 아니었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2월 8일 방송>
2. 어느 목사님이 유명세를 얻게 되자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싫어하는 교인이 있다면, 사표를 쓰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는 생각을 바꾸었는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좋아한다면, 그 곳에서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입니다. 첫 생각은 교만했던 자신을, 다음 생각은 철이 든 자신을 살펴본 얘기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의 발상을 예수님에게서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38-40절). 제자들의 보고에는 주님의 제자가 아닌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빌어서 치유 기적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주님의 이름을 사칭(詐稱)하지 말라고 다짐을 해 주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지 말라고 말리십니다. 비록 주님을 따르지는 않지만, 주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좋은 일을 한다면, 당장은 주님을 비방하거나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순수나 정통을 내세우면서 서로를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우리 교계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일간지에까지 불거져 나온 WCC 개최와 관련된 소위 <공동 선언문>은, 우리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정통 신앙을 주장하는 분들이 내세우는 내용이, 너무도 식상하는 것들인 때문입니다. 단골 메뉴인 공산주의-인본주의-동성애 반대에 한두 가지 다른 메뉴가 곁들여졌는데, 종교 다원주의 배격, 개종 전도 금지주의, 성경 66권 무오류성 인정 등 입니다. 당연한 주장 같고 우려되는 문제들임에 분명하지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공산주의를 찬양한다거나 종교 다원주의나 동성연애자 반대 자체가 아닙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기독교의 근본 신앙과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선동적인 구호에 머무는 태도라는 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다시 되풀이 합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여기서 “반대하지 않는” 이란, 기독교 신앙의 근본과 정체성에 대해 반대하지 않음이 아닐까요? 남의 집 기둥에 침을 바르고, 이 집은 내 것이다는 식의 전도방식도 성찰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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