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418호 (2013. 6. 21. 금요일).
시편 시 102:12-16.
찬송 41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거지들의 무리지만 옛날에 각설이 패라고 하면, 동네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집단이었습니다. 잔치 집에 각설이패가 와서 타령 한 자락 불러주지 않으면, 인심 박한 집으로 찍힐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각설이패의 한 두목이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던 깡통과 숟가락 옷가지를 골고루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모두 물리더니 수제자만 불러서 종이 한 장을 내 밀었습니다. 거기에는 동네 부잣집 제삿날과 생일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평생 배곯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정보였습니다. 그러나 수제자는 그 종이를 북북 찢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저를 썩은 거지로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쉽게 세상을 살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앞으로 쉽게 살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라는 게 어디 그럴까요? 애드가 게스트의 <수확과 장미> 라는 시가 있습니다. “규모가 작든 크든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정원을 가지고 싶다면/ 허리 굽혀 땅을 파야한다/ 원한다고 해서 그냥 얻어지는 건 이 세상에 없으니/ 우리가 원하는 그 어떤 가치 있는 것도/ 반드시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 그대가 무엇을 추구하든지 간에/ 그 속에 감추어진 원리를 생각하라/ 수확이나 장미꽃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나 끊임없이 흙을 파야 한다” 수고 없이 수확을 얻을 수 없다는 진리. 심지어 평화와 사랑과 행복과 지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마저, 수고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열매입니다. 잊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것이 평범한 절대 진리인 것을요.<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6월 12일 방송>
2.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갑자기 가슴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공동번역 성경) 그리고 그 다음 단락(45-46절)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치들을 쫓아내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너희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도다.”라고 화를 내십니다. 여러분은 어느 때 화가 나십니까? 기분을 상하게 할 때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화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들이 제 길을 걸어가지 않거나, 거짓되게 살 때가 그렇습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할 기회와 조건들을 다 팽개쳐 버리고, 불행의 소굴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지켜볼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리석고 바보처럼 위험한 길로 들어설 때, 주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던 것입니다. 사랑의 분노이며, 의로운 분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분노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깔 사나운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저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 여러 차례 잔소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귀 기우려 듣지 않고 멍하니 딴 생각에 잠겨 강의시간을 헛되게 흘려보내는 학생들을 바라볼 때, 자신에게 말할 수 없이 화를 냅니다. 그리고 그게 일회성이 아니라 아예 학습 태도로 굳어져 있는 경우라 판단되면 포기해 버립니다. 강의 내용에 문제가 있어서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만,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묵상자료를 며칠에 한번씩 몰아서 읽는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매일 그날의 삶을 살지않고, 여러 날을 묶어서 살아가는데 습관이 된 이들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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