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717(2019. 10. 7. 월요일).

시편 38:15-18.

찬송 24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사교계의 풍경을 대변하는 단어 중, 프레시웨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값비싼 귀중한 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단어 프레셔스(precious)와 같은 뜻의 명사이지요. 그런데 17세기 프랑스에서는 그 단어가 특별한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습니다. 자신에게 높은 값을 붙이는 여자, 높은 곳에 머무는 여자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 겁니다. 거기서 그녀들의 주장이나 풍조를 지칭하는 프레시오지테라는 파생어도 생겼는데요. 한 때 유럽에서 유행했던 살롱문화를 지칭하는 파생어라고 합니다. 그런 프레스오지테의 모태는 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교계였습니다. 그리고 관심사에 따라서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종교전쟁시대의 살벌한 풍조를 없애고 우아한 시나 산문 등의 언어를 만드는 게 살롱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후기에는 연애나 결혼 문제에서부터 문학 수학 천문학 등이 주된 관심사였지요. 그러니까 프레시오지태의 기본정신은 한마디로 자신을 하층 계급과 구별하려는 엘리트 정신입니다. 따라서 프레시오지테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데서 오는 허영 자만이 있으며, 프레시오지테 문학은 자연적이 아니라 기교적이다. 둘째, 프레시오지태는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과 그 주변에 그를 부추겨주는 사람들을 전제를 함으로, 거기는 항상 일종의 아부하는 사람들이 있고, 모임에는 배타적인 정신이 수반된다. 셋째, 프레시오지태는 사교계의 유한계급이니만큼,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저속하다고 배척한다. 따라서 문학상의 유일한 원칙은 마음에 든다 즐긴다 라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이 도덕적 목적을 지니는 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들은 예술지상주의 자였다. 넷째, 또한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주된 소일 거리였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사교 인사에게 필요한 지식 교양을 획득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문적인 지식은 현학주의라고 해서 극력 배척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105일 방송>a.

 

2. “벧엘의 제단이 무너지다(1-10)”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앞뒤를 잘라버리고 가운데 토막만 듣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오해를 낳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섬기려고 만든 제단이 산산 조각이 나고 그 위의 잿가루가 쏟아질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2:20-33에 그 전말이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열 지파의 왕이 되었는데, 근심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만이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둘로 갈린 상황에서,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배를 핑계로 남왕국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을 출입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남왕국 르호보암에게 마음이 쏠려서 북왕국을 배반하고 자신에게 위해(危害)를 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서 벧엘에다가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족보 없는 성전을 지으려니까 뭔가 허전해서 그 옛날 아론이 그랬듯 금송아지 두 마리를 성전 중앙에 앉힌 것입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제사장 지파인 레위인 가운데서가 아니라 일반인으로 제사장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매년 815일이면 분향제를 드리도록 제도화한 것입니다. 정통성을 상실하게 되면 그 다음은 온갖 잡()것들로 채우기 마련입니다.

   이런 전말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의 사자가 왜 요시야란 인물이 여로보암의 왕위를 계승해야 할 이유나, 벧엘 성전이 무너져야 할 이유가 이해될 것입니다. 우리는 벧엘 성전이 무너져야 할 예언을 들으면서 다시금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이해를 진지하게 해 봐야 할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인이나 남왕국 유대인을 망라해서, 그리고 모든 크리스천들까지도 포함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일의 진정성에 대해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기독교회가 예배를 섬김이라고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배의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예배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는 하나님과 예배자의 교제인데,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오시고, 예배 자들도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성경적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선 예배 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몇 가지 전제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라는 점,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할 다른 것(우상)을 섬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시다는 점 등입니다. 그런데 예배 자들은 이런 하나님보다는 뭔가 아름답고 화려하고 고급스런 것들로 치장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 대신 인간이 중심이 되는 폐단이 생기곤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성전의 필연적 현상입니다.

 

3. 주성 농인교회에는 세 분의 할머니가 맨 앞자리에서 제 설교를 경청하시는데, 평균 나이가 92살이십니다. 그 분들이 알아듣는 설교를 하려고 힘쓰는 게 저의 과제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