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759호(2019. 11. 18. 월요일).
시편 49:1-4.
찬송 42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군들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누군들 그의 생애와 그림에 한없는 안타까움과 경외심을 함께 느끼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특별히 남다르다면, 프랑스 남쪽의 아르를 꼭 한번 찾아 가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 가면 고흐의 그림 아를 의 포름 광장의 카펫 테라스 속에 등장하는 밤의 카페를 볼 수 있습니다. 노란 색 불빛과 노란 색 벽이 환한 그 카페야 말로, 100년 전에 고흐가 사랑했던 노란색을 지금도 그대로 느끼게 해 주지요. 한 수필가는 작년 이맘 때 쯤 그 카페를 찾았는데, 그날 하필 카페가 문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림 속에서처럼 바깥쪽 카페테라스에 앉아서 차를 마실 수가 없었지요. 그 불 꺼진 카페가 그림과 너무 달리 을씨년스러워서 처음엔 많이 당황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이 어둠과 황량이 이곳에 살던 때의 고흐의 내면이겠구나. 그런데도 이토록 어둡고 혼란스러운 내면을 이겨가면서 그토록 환하고 밝은 불빛과 밤하늘의 별들을 그린 거겠구나, 문득 눈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고흐라는 존재가 먼 미술사 속에 아득한 화가가 아니라, 생전에 알아봐 주지 못했던 불행한 주위 사람들 같이 생생하게 실감됐고, 그래서 너무 추운 밤이었지만, 불 꺼진 카페 앞에서 그렁그렁 한참 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눈물은 근처에 있는 생레미의 생폴 정신병원에 가도 문득 찾아듭니다. 그곳이야 말로 고흐가 그림에 담은 고흐의 병실 고흐의 방이 있습니다. 그리고 역시 고흐가 그린 색색깔의 아름다운 정원도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그가 그런 병원에서 거의 스스로 입원까지 해 가면서, 죽음처럼 찾아든 정신적인 피로와 착란을 이기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그런데도 현실은 얼마나 차갑고 무심했던지. 천천히 둘러보다가 문득 눈물이 솟구치고 맙니다. 그러면서 살아있는 동안 너무 불행하지 말자. 옆에 누군가가 너무 불행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자. 결심하게 되지요. 그런 결심과 눈물이 영혼을 너무 맑게 정화시키는 느낌이어서, 아를을 다녀온 사람들은 꼭 한 번 더 그곳을 찾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혹은 그 먼 곳까지 다시 찾아갈 수는 없으니 고흐에 관한 영화나 전시회가 열리면 무조건 찾아가기도 하지요. 그렇게 누구보다 금세 강렬하게 마음을 뒤흔드는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그루트 준데르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KBS FM 1 가정음악 2019. 2. 11. 방송>
2. 신학교에서는 공관복음서 문제라는 주제를 배우게 됩니다. 공관복음서(마태복음서 마가복음서 누가복음서를 통칭)가 갖는 유사점과 차이점에 의문을 갖는 것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각 복음서의 특징에 대해서 연구하게 되었고, 마태는 책이라는 특징을, 마가는 복음이라는 특징을, 누가는 내력(역사)라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서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신앙적 교과서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목적은 신생(新生)한 예수파 교인들의 신앙 훈련을 위한 또는 신앙교육을 위한 교과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구약과의 연결을 모색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1-8절)”, “엘리야와 요한(9-13절)” 역시도 그런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출현한 존재가 아니라, 이미 구약의 위인들(모세와 엘리야)을 능가하는 인물이라는 것과, 세례자 요한 역시 제2의 엘리야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신비현상에 대해서는 너무 과민반응을 갖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신비한 일들은 종종 일어나는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씀하듯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눈부시다던 지,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온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입니다. 이런 신비현상을 어떤 설명으로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적어도 예수님에 관한 한은 믿음으로 수용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흥사나 설교자가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당연히 의심해야 하고,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게 정상일 것입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이런 신비현상 앞에서 매번 놀라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혹은 하나님의 현실 참여라는 범주에 넣고 수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삶에 찾아오시는 모든 것은 기적이고 신비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기를 기도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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