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784호(2019. 12. 13. 금요일).
시편 55:1-3.
찬송 41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 중에서도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 어떤 사람일까요? 여러 가지 타입이 떠오를 수 있지만요, 같은 조건과 같은 상황인데, 어제는 이런 반응이었다가 오늘은 저런 반응을 보이는, 도무지 예측하기 힘든 행태를 보이는 사람이 아마도 상위권에 꼽힐 겁니다. 같이 있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드니까요. 하지만 또 우리 자신 모두는 이런 말 가끔 듣지 않나요? “참 지난번에는 좋다고 하더니, 오늘은 왜 또 싫대? 전에는 그렇게 별로라더니 이제는 좋은가 봐.” 그런 말들. 늘 항상 변함없이, 일관성 있게 합리적일 수 있다면 이라면 많은 것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편해지고 쉬워지겠지만요. 하루에 5 만 가지 생각을 하면서 새털처럼 많은 날들을 사는데, 아무리 좋았던 거라도 어떻게 늘 좋기만 하고, 어쩌다 싫었던 거라도 늘 싫기만 할 수 있을까요?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금해 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 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고흐의 그림들은 그렇게 노력과 나태, 희망과 절망이 이랬다저랬다 왔다 갔다 하면서,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늘 노력했던 것도 아니었고, 늘 희망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은 또 어떤가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여주인공 아우이가 했던 말이 있어요. “사랑이란 냉정과 열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것은 아닌지, 냉정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엔 열정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고, 열정으로 다가가는 순간에도 냉정이라는 또 다른 감정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같은 상황에서도 같은 사람을 두고서도, 내 안의 감정이 썰물치고 밀물지듯 널뛰듯 하는 이유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한 그루의 나무와 같기 때문입니다. 요하일의 시처럼 그 나무 안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잎새는 뿌리의 어둠을 벗어나려하고/ 뿌리는 잎새의 태양을 벗어나려 한다/ 나무는 나무를 벗어나려는 힘으로/ 비로소 한 그루의 아름드리나무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한 그루의 아름드리나무가 되고나면, 어쩌면 잔잔해 질 지도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1년 12월 13일 방송>
2. “위선자들에 대한 책망(27-36절)”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37-39절)”을 읽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왜곡된 가르침과 위선에 대해서 저주하던 말씀이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옮겨가고 있어서 당황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추이(推移)였을지 모릅니다. 적어도 유대의 정치 경제 사회 지도자는 물론 종교 지도자들 역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범죄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성경에서 여호수아 10장 1절에 등장합니다. 주전 1,400년 당시의 예루살렘은 우루살림(U-ru-sa-lim)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뜻은 “평화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무려 600회 이상 나오는 지명이기도 합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일한 왕국의 수도로, 여기에 성전이 세워졌고, 왕조시대에는 여기에서만 합법적인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왕의 도시이면서 선지자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 신성한 하나님의 도시 평화의 도시가, 실제로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온갖 불의의 도시가 된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첫째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찬미 받으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한 예루살렘은 반드시 심판을 받으실 것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구원자가 찬양을 받으며 오실 곳이라는 점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주님의 책망의 말씀과 희망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시로써 많은 순기능과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이루어진 불의와 악행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일입니다.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구세주를 세상 한 복판에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감격할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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