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847(2020. 2. 14. 금요일).

시편 68:19-21.

찬송 20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그것은 하도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 비칩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옛날에 어린이들이 입고 다니는 윗옷의 소매 뿌리는, 반질반질하게 윤이나 있곤 했습니다. 어르신들이 요즘 어린이들은 콧물도 잘 안 흘린다고 감탄 아닌 감탄을 하는데, 정말 옛날 어린이들은 의례 콧물을 흘렸고, 아무렇지도 않는 듯 소맷부리에 쓰윽 닦았지요. 이렇게 소매 뿌리러 콧물 닦기가 하루 동안 반복되면, 나중엔 반질반질 했습니다. 반질반질하다고 하면 깨끗하게 닦인 상태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이런 경우는 반대로 때를 깨끗이 닦기는커녕, 때 위에 때가 쌓이고 쌓여서,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경지에 오른 셈입니다. 서정주 시인의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으면, 외할머니네로 갔다고 합니다.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오디 열매를 따다 주시면, 그걸 약으로 삼아 뒤안 툇마루로 가 앉았는데,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그곳이었던 이유는, 어머니가 차마 그곳까지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어린 마음에도 알아차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었을까? 외할머니네 집 뒤 안에는 장판지 장 만큼한 먹 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 날마다 칠해져 온 곳이라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 손때도 꽤나 많이 묻어있었을 겁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곳은 어머니가 처녀 시절을 보낸 소중한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도 많이 문지른 건 툇마루뿐 아니라, 그 시절의 마음 도였을 것입니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 울적하면 울적한 대로, 문지르고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인 것은, 툇마루뿐 아니라 기억도 일겁니다. 툇마루 같은 물질뿐 아니라, 기억도 손때 묻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는 듯 반질반질해 지는 그런 순간이 옵니다. 그 시절의 마음을 출렁이고 들썩이게 했던, 울퉁불퉁 오돌토돌한 문양은 닳아지고 반질반질 번질번질하게 거울로 닦이어져, 그 시절의 나를 편안한 마음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될, 언젠가가 올 것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34일 방송>

 

2.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31-38)”악마의 자식(39-47)”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진리와 자유는 서로 다른 개념이고 서로 다른 영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개념을 연결 짓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유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유로운 삶을 꿈꿉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자유를 누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인간들의 약점을 꿰뚫어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종으로 사는 동안은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대인들은 화를 냈습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한 번도 종살이를 한 적이 없다고 말입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이집트에서 430년간 노예생활을 했고, 바벨론에서 70년간 노예로 살았으며, 그 후로도 히틀러에게는 6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노예처럼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온 백성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조상 아브라함을 중간에 두고, 예수님과 설전을 다시 벌입니다. 유대인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혈연이나 지연 학연 같은 외적인 것들로 자기 정체성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의 의미는, 아브라함의 정신 혹은 아브라함의 삶의 목적을 본받아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강조하십니다. 다른 말로하면 아브라함은 죄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를 다루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15:6). 그것은 아브라함이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던 그 믿음을 보시고 이를 의로 여기셨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삶을 요약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그리고 가나안으로 옮겨갔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을 것을 믿었고,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자손을 주시마한 약속을 믿고 100살에 얻은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내세우려고 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 참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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