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848호(2020. 2. 15. 토요일).
시편 68:22-23.
찬송 23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단순함은 외형으로 판단할 수 없는 마음의 속성이다. 그건 조화 안정 느긋함이자 솔직함이며, 종종 단순한 삶의 방식을 통해 표현되는 정갈한 마음이다.” 자연과 함께 할 때,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건 단순함 덕분 아닐까요?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언제나 단순합니다. 때가 되면 피고 지고, 오고 갑니다. 딴 마음을 품고 소란을 피우거나 필요한 것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내 것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걸 갖기 위해, 조바심을 내지도 않습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그들의 방식대로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순조롭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처럼 단순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2박 3일 놀러가는 여행가방 싸는 것만 봐도 복잡합니다. 다 싼 여행 가방을 들어보면 꽤 무겁지요. 며칠 놀러가는 여행가방도 이 정도 인데, 수십 년 사는 인생은 얼마나 복잡하고 무거울까요? 가지면 가진 무게만큼, 못 가지면 못 가진 무게만큼, 무겁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떠안고 살려니, 복잡해서 무거워서. 세상의 많은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들, 기쁘고 감사한 일들 앞에서 감각이 무뎌집니다. 점점 가슴이 딱딱하게 굳어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사가 복잡하고 무겁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그 무거운 쳇바퀴에 짓눌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 모두 놀랍고도 기쁜 삶을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선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깃들여 있는 단순함을 회복시키는 게 필요합니다. 미국의 칼릴 지브란이라고 불리는 작가 휴 프레이더가 말했습니다. “단순함은 외형으로 판단할 수 없는 마음의 속성이다. 그것은 조화 안정 느긋함이자 솔직함이며, 종종 보다 단순한 삶의 방식을 통해 표현되는 정갈한 마음이다. 단순한 삶은 보다 단순한 식사에 만족하고, 보다 잘 짜여진 일상을 추구하며, 시간을 더욱 현명하게 활용하고, 덜 번잡스럽고 재정적인 혼란을 덜 겪으며, 이것저것에 덜 얽매이는 삶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더 작은 세계 더 큰 평화를 누리는 삶이다.” 단순하게 사는 게 말처럼 쉽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단순하게 살지 않는 게 더 힘들고 어렵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내려놓는 게 어렵다면, 다 지고 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어느 쪽이 되더라도 어쩔 수 없어서 라는 말보다, 내가 선택해서 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랍니다. 자기의 선택이 인생의 대부분을 만든다는 믿음이야말로, 삶의 방식을 단순하게 만드는 정갈한 마음의 시작이니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년 3월 24일 방송>
2.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47-59절)”을 읽었습니다. 현존하는 역사적 인물이 자신을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물론 신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 전북 진안 마이산(馬耳山)에는 80기의 석탑이 있는데, 이갑룡(1860-1957) 처사가 쌓았다고 하는데,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있어서 神物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 분에 관한 기록에는 그 신비로운 돌탑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처사가 축지법을 이용해서 전국의 돌들을 모아다 쌓았다고 전하고 있는데, 억지로 신화적인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작된 신화들은 우리 주변에 많고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자신을 스스로 신화적인 인물로 소개하는 내용이 있는데, 수천 년 전의 인물이었던 아브라함보다 먼저 존재했다고 밝히며, 자신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린 사람이라고 하며 돌을 들어 치려하였습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유대인들의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축지법을 통해서 시공을 초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해괴한 소문을 조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화를 구성하는 전형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시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것은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신앙의 세계에서 라고 말입니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수많은 조건과 제약이 바탕에 깔려 있어서, 소위 불가능한 일들이 가득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활동하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자연숭배에 가까운 무신론자 콘스탄티누스라는 황제가 로마의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도들을 사자의 먹이로 제공하는 엄청난 볼거리에 주빈으로 참석하였습니다. 경기장 한 복판으로 수백 명의 기독자들이 끌려나왔고, 이어서 굶주린 사자들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불안과 두려움에 초죽음이 되어 있어야 기독자들은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즐겁고 경쾌한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둘 사자의 발톱에 할퀴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관중석의 로마인들은 취기가 어린 얼굴로 주정뱅이들이 하는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장면을 바라보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며칠 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것입니다. 로마의 찬란한 문명을 계승할 사람은 썩은 동태눈을 가진 로마인이 아니라, 샛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미래를 개척할 기독교인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식에도 미치지 못한 유다 지도자들. / 요 9:18-41. (0) | 2020.02.18 |
---|---|
절망같은 운명을 만날 땐,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기대하기. / 요 9:1-17. (0) | 2020.02.17 |
죄에서 자유로워야 참 자유. / 요 8:33-47. (0) | 2020.02.14 |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게 먼저. / 요 8:21-32. (0) | 2020.02.13 |
선문답 같은 대화속에서 지혜를 발견할 수 있기를. / 요 8:12-20. (0) | 2020.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