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14호(2020. 7. 30. 목요일).
시편 95:4-7.
찬송 50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날씨가 어떤지 조차 알고 싶지 않아, 유리창을 모두 가리고 어둠속에 앉아 있는 그에게, “빛이 전혀 안 들어와 너무 어둡지 않아요? 날씨가 좋은 게 왜 싫은가요?” 아내가 묻자, “날씨가 좋은 게 싫은 게 아니라, 날씨가 어떤지 알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하며 그는 스위치를 돌려 전등을 켤 수 있다는 것조차 알고 싶지 않다면서, 전등도 떼어버렸습니다. 얼마 뒤 그와 아내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당신은 무엇을 모르게 됐나요?” “난 아직도 모든 걸 알고 있어. 날씨가 어떻다는 건 모르지만 어떨 수 있다는 건 여전히 알고 있고, 당신이 가져다 준 저 것이 감자와 고기라는 것도, 내가 입 밖에 내는 모든 단어들도 알고 있어. 이젠 날씨를 알지 못하면 어떻다는 것까지 알게 됐고, 깜깜해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 여전히 사물을 분간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 그러자 아내가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엔 당신이 모르는 것들도 있어요. 이를 테면 좋은 날씨를 중국어로 뭐라고 하는지 모르지 않아요?” 그러자 그는 곰곰이 생각했지요. “그건 원래 모르고 있었으니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할 필요가 없군. 나는 우선 뭐가 알고 싶지 않은지 알아야겠어.” 몇 해가 지난 뒤 마침내 중국어를 할 수 있게 됐을 때, 그는 말합니다. “모든 걸 안 다음에야 비로소 그 모든 걸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 그렇게 세상의 모든 지식을 하나씩 알아나가다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 모든 걸 알고 자 했던 사실을 잊어버린 채 옛날처럼 살게 되는 그. 달라진 건 이젠 중국어도 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책장은 책상이다] 로 잘 알려진 작가 피터 빅셀의 [아무 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남자의 이야기]인데요. 세상의 기준에서 비켜나, 자신만의 진실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소외와 상실. 지구 끝과 끝에 있어도 소통이 언제든지 가능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새로운 고립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년 9월 6일 방송>
2. “하나님의 진노와 자비(19-29절)”과 “이스라엘의 잘못(30-33절)”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둘째 단락을 묵상하겠습니다. 말쟁이란 별명을 가진 목사님들 앞에서 20년간 성경 강습회를 인도할 때, 겁도 없이 질문을 해 보시라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제법 많은 소득을 얻기도 했지만, 진땀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질문이란 호기심에서 또는 지적인 갈증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질문하는 것을 포기해 버린다고 합니다. 대답들이 신통치 않거나, 너무도 뻔한 대답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방향을 좀 틀어서 자신에게 질문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묵상해 보거나 찾아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선민과 이방인이 자리를 바꾸게 되었느냐고 말입니다. 어떻게 선민의 사랑을 이방인이 받게 되었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이런 반전(反轉)이 일어나다니 낯설기도 하고 놀랍기도 합니다.
그것은 관계였습니다. 동서양의 언어 특히 한국어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보고서가 있습니다. 한국어는 동사가 매우 발전했는데 반해서 서양언어는 명사가 발전했다고 말입니다. 한국어 동사는 지금까지도 발전했지만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동사의 발전은 인간관계에 대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높임말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은 사람은 이방인이고, 유대인은 끝내 그 관계를 찾지 못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방인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하나님이 제정하시고 시행하신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 얻은데 반해서, 유대인은 그 올바른 관계를 스스로의 공로로 얻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이 이런 믿음에 이른 것이 그들의 자질과 능력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사도는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시온에 놓은 큰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이야 말로 수치를 당치 않는다는 말인데, 여기서 말하는 큰 걸림돌은 걸려 다치게 하는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제 정신을 차리게 하는 보석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눈뜨게 하는 깨우침을 주는 때문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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