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51(2020. 9. 5. 토요일).

시편 104:14-17.

찬송 3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 보시게> 교사 초년병 시절에 나는 잠깐 회의를 느끼기도 했었네. 첫 번째 제자들을 졸업으로 떠나보내면서, 아뿔싸, 이 교사라는 직업은 평생 이렇게 이별만 해야 하는 존재로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고나 할까 인생이라는 게 만남 속에 이미 이별의 씨가 이미 자리 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3년에 한 번씩 아니 해마다 그런 이별 의식을 치러야 한다는 게 참 허무했었어. 이 이별이 자네들에게는 강을 떠나 자신들 만의 먼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야. 그런데 자네처럼 해마다 소식을 전해주고 연말이면 또 가족이랑 친구들을 몰고 찾아와 주는 제자들 몇 명 덕에, 그런 교사 초년병 때의 회의감은 이미 지워버린지 오래라네. 그런데 그런 회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자네 같은 제자 덕분에 쉽게 지워졌지만, 내가 좋은 스승이었던가 하는 자문에는 아직도 쉽게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라네. 그저 기운 내라는 최소한의 몇 마디를 해 줄 수 있었을 뿐, 운신의 폭이 그리 넓지 않은 시스템 안에서, 자네들이 활짝 꽃 피울 수 있는 그런 조건을 만들어주지는 못했던 것 가태서 말야. 게다가 그런 교육 환경이 점차 나아진 다기 보다는 조금씩 복잡해지면서, 요즘 학생들이 예전의 학생들보다 더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뭔가 제대로 할 일을 못해놓고 나온 것이 분명하다는 자괴감을 떨쳐 버리기 힘들다네. 하지만 제자들은 언제나 스승을 훌쩍 뛰어 넘어버리곤 하지. 어리둥절하던 신입생의 표정이 졸업할 때쯤 보면 눈매도 기상도 강건해 져서 떠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확실해 지곤 해. 우리들이 못한 일들은 그렇게 강하게 단련돼서 세상에 나간 자네들이 해내리라 믿을 따름이네. 그래서 선생님들은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존재들인 셈이지. 제자들의 그 큰 힘을 믿기 때문이라네. 연말에 만날세. 건승을 비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515일 방송> b.

 

2.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1-18)”을 읽었습니다. 전설이나 신화는 사람들의 강렬한 욕망과 평행선을 그으며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양문(羊門)곁에는 간헐천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질병이든 깨끗이 낫는다는 전설 말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환자들이 언제 물이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들끓고 있었으며, 거기에 38년이나 된 반신불수의 환자가 있었고, 주님이 방문했을 때는 안식일이었는데, 주님은 그에게 관심을 갖고 얘기를 나눈 일화입니다. 그를 만난 주님은 그가 낫기를 원하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느 덧 38년이란 시간이 흘러간 것입니다. 물론 그 전설이 실제로 기적을 일으켰는지는 전혀 암시도 없습니다만, 그저 전설로 전해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불쌍한 38년 된 불구자를 말씀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라.” 주님의 말씀은 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문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참 이상한 종교법이 있습니다. 배가 고파도, 시궁창에 양이 빠져도, 사람이 죽어가는 시간에도, 안식일의 39가지 시행규칙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했으니 말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무시하는 시행령은 진지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모든 법의 제정 정신은 생명을 지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전교조가 노조로 합법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는데, 그동안 헌법 정신과 다른 시행령의 제한 때문이었음을 바로 잡았다 합니다. 요즘 우리 정치권이나 소위 유튜브에 나오는 논객이라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법 정신을 얘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정교 분리의 법이나 삼권분립의 원칙까지도 형식 논리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참 어리석고 가관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어 버렸을까요? 8.15 집회 허가를 두고 사법부의 결정에 두말하지 말라는 식입니다. 삼권분립이 상호 견제(牽制)를 통해서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어 보라는 뜻인데, 아예 상호 견제가 아니라 일부 국민의 생명권을 위협하는 세력에 동조, 국가 권력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호 견제가 아니라 대립구도로 국민을 혼동에 빠트리는 약용의 표본이 될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사람간의 거리두기와 전염확산을 막는데 선두에서 일조해야 할 법관이 오히려 비웃듯 개입한 셈이 되었습니다. 법은 물론이고 모든 말과 행위는 그 바탕이 되는 법 본래의 정신과 목적을 십이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면(對面)예배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어리석은 목사들도 제정신을 차리고, 생명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며 장소나 건물은 그 수단일 뿐입니다(4:21-24).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