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50호(2020. 9. 4. 금요일).
시편 104:10-13.
찬송 41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경수 선생님께> 어김없이 5월이 왔고, 또 어김없이 봄꽃들이 피었다가 지고, 오늘 다시 스승의 날이 됐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저는 늘 이맘때 쯤, 선생님의 그리운 이름을 불러보고, 고교시절의 한 때를 회상해 보게 됩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선생님께서는 어떤 교단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참 멋지셨어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벌써 모든 것을 사춘기 아이들을 하나하나 존중해 주신 것도 그렇고, 오로지 인생에는 시험점수와 성적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쉬운 저희들에게, 세상에는 더 중요한 가치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을 일러주느라 목소리를 높이셨던 것도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또 입시로 인해서 시들어가는 저희들을 위해, 매일 아침 조회시간마다 동서고금의 좋은 글귀들을 찾아내 낭송하고 해석해 주시느라 바쁘셨었지요. 그 모든 것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검증을 받은 고전을 읽어야 한다면서, 우리들에게 고전의 멋과 맛을 처음으로 소개해 주신 것도 선생님이셨어요. 저음의 바리톤 음성으로 읽어주시던 단테의 지옥의 문에 적혀 있는 싯구절은, 저 뿐만 아니라 아직도 많은 우리 반 아이들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 아세요? “나를 지나 사람은 간다.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 사람은 간다.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 사람은 간다. 멸망하는 무리 곁으로. 그리하여 나는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너희 여기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그곳에 남겨 두어라.” 지옥의 문에 새겨져 있다는 그 무시무시한 구절들 읽어주시면서,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해 주셨어요. “모든 희망을 잃는다는 것, 절망한다는 것이, 바로 지옥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라고요. 아직도 힘들고 절망스러울 때면 그 시를 읽어주시던 선생님과 멋진 해석을 떠올리곤 합니다. 연말에 꼭 찾아뵐게요. 건강하세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5월 15일 방송> a.
2.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43-54절)”을 읽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물론 요한복음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긋지긋한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해방되는 일화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병 고침의 기적 이야기들은 너무 흔한 일이기 때문에 식상할 정도입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병자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라는 점과, 둘째는 이런 치유 일화들에는 매우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점입니다. 요즘은 동네 병원을 주로 다니지만, 한 때는 서울대 병원을 비롯하여 대학 병원들을 많이 찾아야 했습니다. 아내의 보호자로써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환자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망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크던 작던 병에 걸리게 되면 모든 일들이 뒤틀려버리고 말기 때문이며, 삶이 피폐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송에 나오는 명의들이 환자를 몰고 다니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제대로 된 명의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명의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조연은 고관이었는데, 다른 번역본에서는 “왕의 신하”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고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방에서는 세도를 부릴 만한 지체 높은 사람이었는데, 그 역시 사랑하는 아들이 중병에 걸려 위중하게 되자 가나에 계신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있는 아들을 찾아가서 고쳐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 분 사이의 대화가 어쩐지 삐딱선을 타고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다 하셨고, 고관은 제발 아들이 죽기 전에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대화의 방향성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주님은 믿으려 하지 않는 세태(世態)를 안타까워 하시는데 반해서, 고관은 목숨이 경각에 놓인 아들을 살리려는데 초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삼스럽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떠올리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 중요하다는 주님과, 앞뒤 가리지 않고 우선 살고 보자는 고관의 가치관 말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의료계와 정부의 관심사를 대입시켜 보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부는 조금 어설프기는 하지만 비교적 큰 틀에서 공공의료 서비스 확충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의료계와 굳이 대립하고 반목할 계제(階梯)가 전혀 아닌 상황입니다. 그런데 반해 의료계는 그런 점을 뻔히 알면서도, 사소한 것들을 꼬투리로 삼아 무효화시키려 합니다. 다수의 국민들은 제 밥그릇걱정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싸움을 시작했다고 말입니다. 정부는 재논의의 장을 약속했지만, 무효화라는 명문을 밝히기 전에는 재투표까지 하면서 반대하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다시 대도시로 올라올 것이라며 보수 보장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림대 김현아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지방 의사들의 보수가 훨씬 더 높았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 뚜렷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도 사는 것 같은 삶을 사는 것이며, 죽어도 값진 삶이 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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