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49호(2020. 9. 3. 목요일).
시편 104:6-9.
찬송 25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병규야> 조금쯤은 머슥하고 조금쯤은 낭만적이기도 한 너의 편지 잘 받았어. 문자나 전화의 세계로는 느끼지 못할 너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이 들어서 참 좋으네. 사과 편지가 아니라 그저 순수하기만한 러브레타였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대 만족이야. 네가 먼저 사과는 했지만 나에게도 문제는 있었다고 생각해 내 쪽에서라도 침착하고 차근차근하게 말을 풀어나갔더라면, 그렇게 격하게 서로의 감정이 상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런데 너무 피곤해 보여서,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았느냐? 피곤해 보인다. 이렇게 걱정하는 마음을 담고 한 말이, 너에게는 그저 꼬치꼬치 캐 묻는 말, 또 귀찮은 말로만 들렸다는 것에 많이 놀랫던 것 같애. 나는 걱정하는 마음과 간섭하고 따지려드는 마음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넌 둘 다 매우 비슷하거나, 심지어는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어. 네가 보내준 글귀처럼, 너나 내가 우리로 하나가 되려면, 아마 같은 제품의 번역기라는 이용해애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지만 각자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다면, 또 다른 오해가 거듭될텐데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이문구 작가가 돌아가시기 전에 동시집을 내셨어. 거기에 <새>라는 동시가 있어. “산에는 산새, 들에는 들새, 물에는 물새, 들고 나는 새 하도 많아도. 울음 소리 예쁜 새는 열에 하나가 드물지. 왠일이냐고? 이유는 간단해. 듣는 사람이 새가 아니라는 거야.” 이런 짧은 동시야. 새들끼리의 말을 사람의 위치에서 듣고서, 저 새의 울음 소리는 예쁘다, 저 새는 사납게 운다. 이렇게들 판단하지 말라는 이야기이겠지. 우리에게도 참 중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네가 하는 말, 내가 하는 말이, 우리 모두에게 아름답기 위해서, 앞으로 우리 서로의 말을 잘 더 듣고 잘 해석하도록 노력하자. 그럼 다음에 봐.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5월 14일 방송> b.
2.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27-42절)”을 계속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적어도 4가지 단편적인 기록들을 묶어놓은 것입니다(27절, 28-30절, 31-38절, 39-42절). 그런데 두 번째와 네 번째 기록들은 예수님과 얘기를 나눈 사마리아 여인의 말과 행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할 구절들입니다. 주님과 얘기를 나눈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예수와의 일화를 전했습니다. “그 분이 그리스도인지 모르겠다. 나의 모든 과거지사를 훤히 알고 계셨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그녀의 말만을 듣고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한 일입니다. 제가 몇 달 동안 전도관 사람들과 이웃에서 살았습니다. 전도관에 나간 연유가 궁금해서 물었는데, 아주 분명했습니다. 자신이 잘 아는 분이 오랜 지병에서 깨끗이 고쳐졌다고 해서 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쳤다는데 할 말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포천의 할렐루야 기도원에는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들어서 이틀이나 자신들과 함께 묵게 하였는데,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듣는 가운데 주님이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에게 믿음에 이르는 가장 흔한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하겠습니다. 간접 경험을 통해서도 믿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상적인 전도 방법으로 인격적인 전도를 가르쳐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빌립과 안드레 전도방식이라고 말입니다. 오랜 우정을 쌓은 친구관계나 가족 관계를 밑천으로 전도를 한다면, 자연히 인격적인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거짓말투성이에다 사기성향이 강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사람의 전도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인격적인 관계에서나 가능한 것이 전도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전도자는 다섯 번이나 남편을 갈아치우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도 어떻게 맺어진 관계인지 잘 모르는, 소위 사람들에게 크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이 자주 모이는 황금시간대가 아니라, 아무도 없는 한가한 시간에 홀로 물을 길러왔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과거지사를 너무도 정확히 알고 계시며 그녀의 미래까지 꿰뚫고 계신다는 여인의 증언에 대해서는 급강의 호기심과 흥미가 발동했던 것입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흑역사를 남김없이 알고 있는 무당이 있다면 구미가 당길 것입니다. 간접 경험으로도 충분히 전도가 가능하다는 실례를 오늘 본문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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