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223호(2021. 2. 24. 수요일).
시편 시 136:1-3.
찬송 34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일본에서 1년을 살다 온 사람이 있습니다. 오는 길에 일본에만 있고 우리나라에는 없는 물건 몇 가지를 가져 왔습니다. 검은 색 면봉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흰색으로 된 것만 보다가 검은색을 보니,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귀를 청소할 땐 묻는 게 눈에 더 잘 띄니 쓰는데도 더 효과적일 듯 했습니다. 요즘은 조금만 편리하거나 이색적이면 금세 들여오는데, 이건 왜 예외였을까? 잠시 생각해 보게도 됐습니다. 언젠가 우리나라 한 회사에서 동남아에서는 흔하게 사용되던 검정색 치약을 수입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곧 포기했다고 하지요. 치약은 흰색이라는 인식 자체가 너무 강한데다, 특히 검정색으로 이를 닦는 일이 것에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검정색으로 뭔가를, 그것도 입안을 청소한다는 게, 청결한 느낌이 아니었던 거지요. 검정색 면봉도 그래서 달갑지 않았던 걸까요?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는 청소도구 자체에 청결한 느낌이, 일본에게는 청소한 사실이나 성과가 금세 눈에 띄는, 실용적인 측면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색깔이야 검든 희든, 면봉으로 귀를 청소하다가, 솜이 그대로 귀에 남는 사고도 꽤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응급실에 달려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하는데요. 그럴 땐 흰색 솜이 더 찾기 쉽지 않을까요? 어쨌든 귀를 맑고 깨끗하게 해 두고, 뭔지 밝고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싶은 그런 때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2월 22일 방송>a.
2.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시는 예수(23-25절)”과 “니고데모와의 대화(3:1-15)”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번째 단락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저의 제자 한 분이 있었는데, 마침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 실습을 하겠다고 해서 허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출타하는 사이 새벽 기도회에서 자신은 투시 은사를 받아서 여러분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합니다. 그로 인해서 교우들이 많이 불안해 한다는 말을 아내에게 들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을 읽은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셨다는 말씀에서 그런 당돌한 희망사항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얘기하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내 마음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때 제게 아주 크게 혼을 내 주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옛 말도 있는데 어찌 사람 속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주님께서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제사를 드리는 동안에, 여러 날 그곳에 머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평소처럼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복음을 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하시는 기적들을 보고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 기자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까닭은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던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사용합니까? 일부 코미디언들이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희화화하면서 하는 말 중에는 “할렐루야!” 나 “아멘.”과 함께 “믿습니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그런 말들이 모두 빈말 수준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헛소리 가운데 이 믿습니다 를 우리 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할 때, 주님께서 보이실 반응을 한번쯤 생각해 보자는 말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자신의 전 생명을 맡기는 행동이 담긴 말입니다. 마치 3층 높이의 창가에서 매달린 어린 소녀에게, 사람들이 매트리스를 넓게 깔아놓고 걱정 말고 뛰어 내려라고 말해도 꿈쩍 않던 그 소녀가, “엄마야, 걱정 말고 뛰어 내려!” 라는 말에 지체 없이 뛰어내리는 행동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엄마는 당신의 목숨을 걸고 나를 받아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말할 때는 생명을 거는 무게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믿음이 그 정도에 버금가기를 바라고 계신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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