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712(2022. 6. 28. 화요일).

시편 시 82:6-8.

찬송 3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프로이트의 정신이론 중에 <주둔군 이론>이란 게 있습니다. 전투를 지휘하는 지휘관은 보통 가장 어려운 전투지에 가장 많은 주둔군을 배치하지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 전투를 하다가 패하면, 힘을 얻기 위해서 가장 쉽게 이겼던 전투지가 아닌, 오히려 그 곳, 가장 어려운 전투지로 후퇴를 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라는 게 프로이트의 주장인데요. 마음도 대개는 가장 어려운 시절이나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에, 가장 많은 심리적 주둔군을 남겨 놓지요. 그러니 살아가다가 마음이 안 좋을 때나 힘겨울 때도, 오히려 가장 힘들었던 그곳으로 가면, 더 큰 힘과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마음의 주둔군 이론이라는 겁니다. 육이오는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 가운데 하나이지요. 그런 육이오를 되풀이해서 추모하는 것도, 거기에서 우리가 전쟁이나 미움에의 가장 큰 교훈과 각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 봅니다.

<KBS FM 1, FM가정음악, 2007625일 방송>

 

2. “바울과 다른 사도들(1-10)”을 읽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유명하며 가장 많은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많은 오해 속에 있는 분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 당시에 바울 사도의 본명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앞잡이가 되어서 숨어 있는 기독교인들을 찾아내 그들을 박해하는 가장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기독교회의 지도자라며 등장했으니,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 시간을 불신을 받고 협력을 꺼리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최근에도 바울 사도는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데, 그것이 급진적인 신학자들에 의해서 외면을 받는 현상입니다. 1960년대만 해도 중남미를 중심으로 일어난 해방 신학자들과 1970년대에 정점을 찍은 한국의 민중 신학자들은 바울을 패싱하고 예수에게로 가자는 운동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 권력자들과 야합한 지도자로 매도하였고, 순수한 예수의 복음을 윤색한 장본인이라고 하면서 바울의 서신을 폄하하고 복음서 위주의 신학을 재정립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실제로 바울 자신도 이런 저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남다른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후의 행적을 밝힐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의 내용과(9:23-30) 갈라디아서의 내용(1:17-2:10)이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현상에 대한 누가의 기록(1:1-2)입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의 기록인 본문이 1차 자료이기 때문에 행전의 기록보다는 우선권을 두어야 옳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행전에서는 회심 후 곧 바로 예루살렘의 베드로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1차 자료인 본문에서는 3년 후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박해자가 전도자로 변신했다는 이야기는 기독교회가 전파된 나라마다 가끔씩 들을 수 있는 일화입니다. 우리나라도 깡패로 기독교인을 못살게 굴었던 김익두 목사님의 일화가 그 예라 하겠습니다. 사도는 베드로 등 열두 사도와는 다르게 이방선교를 위한 계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계획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유대인으로 이미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바울을 수행하던 디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리스 사람으로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은 점을 들어서 많은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베드로 등 사도들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로, 할례자들을 위한 복음 전도에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해석하였고, 자신과 바나바 그리고 디도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 위한 복음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서로 인정하고 선교 협약을 맺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구두이긴 하였지만, 제가 중국 선교에 나섰을 때, 중국 3자 교회 지역 책임자와 선교 협약을 하였는데, 제가 가르쳐온 루터의 신학을 중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가르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뒤 몽골교회와 베트남 교회 선교에도 이런 선교협약은 계속되었고, 서울의 한 교회에서 말씀과 성찬의 예배를 오랫동안 인도할 때는 이를 문서로 맺음으로, 신학적인 면에서 같으면서 다름을 서로 인정하는 다양성을 인지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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