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711호(2022. 6. 27. 월요일).
시편 시 82:3-5.
찬송 40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람을 안고서 달빛 어린 모래톱을 조용하게 걸어가는 기분, 한없이 평화롭겠지요. 모래가 발밑에서 싸르락 싸르락 밟히는 느낌, 태양빛에 뜨겁게 달구어진 모래가 아니고요, 서늘해진 밤기운을 받아서 적당히 기분 좋은 모래톱은 여름에 맛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유성현 시 박판길 곡 <모래톱>. 조심스럽게 시작하는 도입부가 마음을 끕니다. 표정이 살아 있는 곡이라는 평을 받고 있지요. 정감 넘치는 예쁜 소품 같은 곡입니다. 느리지만 감정이 쳐지는 법이 없이 고른 감정 선을 이어가는 그러한 가곡이지요.
“바람을 안고 말없이 거닐 면, 강나루 모래톱 위에 선다, 달빛 어린 외솔가지, 청모시 휘날린 꿈 속. 아, 사랑의 물들은 꽃이라. 바람을 안고 물새를 따르면. 강나루 모래톱 위에 선다.”
1976년에 발표된 작곡가의 작곡집에 수록되었습니다. 작곡가 박판길은 음폭이 넓고 극적인 분위기의 곡을 많이 발표했지요. 가곡 <산 노을>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모래톱>은 그와는 달리 아담하고 정다운 느낌의 정다운 곡이지요. 곡 앞에 “표정을 넣어서” 라는 작곡가의 주문이 실려 있습니다. “표정을 넣어서” 불러야 하는 정감이 담긴 곡이라는 뜻이겠지요. 작곡가는 자연만큼 우리의 삶을 위로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은 없다. 고 자주 말해 왔습니다. 이 곡 <모래톱> 역시도 자연이 주는 안식과 평안을 느낄 수 있도록 작곡했다고 했지요. 그러한 의도대로 따뜻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6월 26일 방송>
2. “인사(1-5절)”, “오직 하나밖에 없는 복음(6-10절)” 그리고 “바울이 사도가 된 경위(11-17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13편의 서신중에서 주요 서신 4편에 속하는 서신으로,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서신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내용은 초대 기독교회를 흔들고 있는 두 종류의 적대자들에 대해서 경계하며, 바른 신앙위에 서 있을 것을 권고하는 내용입니다. 그 적대자들이란 유대주의에 바탕을 둔 율법주의자들이며, 다른 하나는 헬라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는 도덕적 방종주의자들 혹은 영적인 열광주의자들이었습니다. 도덕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인간중심주의에 빠지게 하고, 열광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항상 지나치다는 점입니다. 과유불급(과유不급)이란 말은 지나침은 애시당초 시작하지 않음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른 복음이란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 곧 구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 가운데서도, 기독교가 믿고 의지하는 복음을 혼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 해 미국에서 백인 목회를 하던 분이 건강상 이유로 귀국해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 믿습니다를 연발하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그 삶이 도무지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을 내세우지 않는 미국인들 중에는 정말 크리스천다운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러느냐고 말입니다. 그 대답은 도덕적이며 양심적인 시민의식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기독교 신앙이 도덕적인 정상에 있을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도덕적 인간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혼란이 도덕적인 생활을 기준으로 삼는 원인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 평화와 행복 그리고 구원이 있습니다.” 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잊어버린 이유 말입니다.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는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제법 됩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모습은 영 아닙니다. 사기꾼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습니다. 제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도덕적인 감각도 시민의식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예수가 나의 구주이십니다.” 라는 절박한 고백이 없어졌습니다. 요즘 교회들은 대체로 갈등과 고통이 없는 평안한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라는 고백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이런 기독교회의 고백은 우리들의 현실적인 삶이 부유하고 평안하기를 목적으로 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도는 다른 복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적 율법주의자들과 이방적 영지주의자들이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도덕적인 만족감이라든지, 천국에 자리를 확보해 두었다는 안도감이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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