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754(2022. 8. 9. 화요일).

시편 시 90:5-7.

찬송 37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옛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삶의 일부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논매는 소리는 뜨거운 땡 볕에서 오랜 시간 사람들은 잡초를 제거하려는 고통과 지루함을 잊으려고 불렀지요. 또 뱃노래는 비위에서의 작업의 능률과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 불렀습니다. 석호 시 조두남 곡 <뱃노래>, 옛 사람들이 부른 뱃노래의 정서를 담으려고 애쓴 곡입니다. 우리 민족의 특유한 순박함과 여유를 느끼게 해 주는 민요에서 유래된 예술 가곡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푸른 하늘에 물새가 춤춘다. 에야 데야, 어서 노 저어라. 님 찾아가자. 두둥실 배 띄워 청춘을 싣고서. 여기는 황포강 노을이 붉고나. 에야 데야 어서 노저 어라. 님 찾아가자. 아득한 창파 만 리 님 계신 곳 어디런가. 맑은 달빛이 물 위에 춤춘다. 에야 데야, 어서 노 저어라 고향에 가자. 순풍에 돛달고 파도를 헤치며 바라다 보며는 하늘도 멀구나. 에야 데야, 어서 노 저어라 고향에 가자. 아득한 수로만리 고향 산천 어디런가.”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89일 방송>

 

2. “이방인의 구원(11-24)”을 읽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방인이라는 용어가 아주 일찍부터 사용되고 있습니다(12:49, 25:44, 4:2).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 이렇듯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한껏 높이기 위해서 타 민족을 얕잡아보는 의미로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성별하셨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시는 방법이었지, 유대인들 자체가 타 민족에 비해서 우성인자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12:1-3이 그 사실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별되고 선택된 것은 축복의 근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이런 하나님의 뜻을 곡해한 유대인으로 인해서, 이방인들이 새롭게 조명된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방인들에 대한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셨고 이 시기심이 구원받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말씀합니다. 사실 시기심이란 자신이 갖고 싶거나 이루려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졌을 때 부러워하는 마음이기에 새로운 의욕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은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과 그들 이방인의 관계에 대해서 진술합니다. 택함을 받은 민족과 그렇지 않은 민족이라는 이분법이 그들을 화나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분법은 적어도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공정하지 못하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준도 모호하고, 선별과정에서의 능력이나 성품 그리고 의지와 같은 객관적인 차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를 설명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를 접붙이는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올리브 나무를 접붙이려고 할 때, 먼저 가지 몇 개를 잘라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잘라낸 가지에 다른 야생 올리브 가지를 접붙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접붙이는 이유는 나무가 늙어서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또는 열매의 크기나 수확량이 적어서 이를 개선하려고 할 때 싱싱한 야생 나무 가지를 가져와 접을 붙이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접붙이게 된 나무는 다시 젊은 나무로 변신하게 되고, 열매도 많이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런 접붙이는 비유를 통해서, 원 나무에서 잘려나간 가지를 문제가 잇는 유대인으로, 그리고 야생 가지를 이방인으로 이해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도 잊지 않습니다. 야생 가지가 접붙여졌을 때 교만하거나 주인 행세를 해선 안 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가지를 자르듯, 언제든지 접붙인 가지도 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른바 하는 일도 없이 나 때는하거나 꼴통 노릇을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경종을, 그리고 절망하는 이방인에게는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잘라 내어 버리기도 하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시기도 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든지 그 자리에서 선한 농부이신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리고 분별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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