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54호(2022. 11. 17. 목요일).
시편 시 106:43-46.
찬송 8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도심 한 복판에서 여름을 나면서 놀라웠던 일 중에, 매미 소리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길을 지날 때마다 저절로 귀를 막게 만드는 매미소리. 더 이상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자동차 경적만큼이나 큰 소음 공해로 느끼는 분들이 많이 계시더군요. 한 여름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낮잠이라도 들면, 잠든 내가 더울 새라 연신 부채질 해 주시던 어머니, 그 때 귓속까지 시원하게 들려오던 매미소리의 기억, 요즘은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그러한 일들을 추억할 일이 많이 줄었겠지요. 그렇게 고향에 대한 향수가 담긴 작품을 보면, 더욱 더 각별한 애정이 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김노현 작사 자곡의 <황혼의 노래> 역시 그러한 고향에 대한 마음을 담아 낸 곡 중의 한 곡이지요.
“아지랑이 하늘 거리로, 진달래가 반기는 언덕, 깨어진 꿈 추억을 안고, 오늘 나는 찾았네. 내 사랑아, 그리운 너. 종달새의 노래 싣고서, 그대여, 황혼의 노래. 나는 너를 잊지 못하리. 마음 깊이 새겨진 사랑이 아롱지네. 맑은 시내 봄꿈을 안고, 어린 싹은 눈을 비빌 때, 그 옛날에 아른한 모습, 내 맘에 새겨진다.”
고향을 그리는 절절한 마음이 곡을 통해 전해 져 옵니다. 실향민이 엇던 김노현 선생은 남쪽에 살면서 평생 동안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낙화암과 절벽 밑으로 흐르는 백마강을 바라보면서, 늘 대동강과 부벽루, 청루벽을 떠 올렸다고 하지요. <황혼의 노래> 이 곡 역시도 낙화암에 올라서 느낀 심상을 담아 완성한 곡입니다. 그는 의례적으로 50이 넘어서 만학으로 음악을 전공했습니다. 1920년생인 그가 이 곡 <황혼의 노래>를 작곡한 시기가 1970년이니까, 그의 나이 51살이 되던 해였지요. 집안의 반대로 치과의사가 되었습니다만, 평생 음악에 대한 미련을 감추지 못했고, 음악에 대한 일이라면 병원은 문을 닫고 참석했다는 일화에서도, 김노현 선생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낄 수가 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11월 16일 방송>
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20-37절)”을 읽었습니다. 며칠 전에 미래적 종말관이 누가복음서의 특징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루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메시야인 인자가 언제 오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핀잔처럼 들립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여기 혹은 저기에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시며, 그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입니다. 4개의 문단으로 나뉜 것을 보니까 적어도 네 차례의 서로 다른 자리에서 하신 말씀을 묶어놓은 것 같습니다(20-21, 22-25, 26-30, 31-37). 둘째 문단에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후라고 하시고, 셋째 문단에서는 노아의 때와 롯이 소돔을 떠나던 날의 현상이 있을 것이고, 넷째 문단에서는 그날이 되면 눈을 뻔히 뜨고서도 서로 황망하게 헤어지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 날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로써는 들어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말씀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닥치게 될 종말은 힌트를 받은 예상문제지와 비슷합니다. 첫 문단이나 둘째 문단은 충분히 확인된 것 같습니다. 미혹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나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미 과거지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노아 때는 먹고 마시고 흥청망청하는 시대 흐림이 비슷하게 진행중이고, 매년 대형화재가 일어나고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천천히 일어날 미래적 종말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 눈을 감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외 없이 임박한 종말관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넷째 문단의 말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롯의 아내처럼 되지 말라는 말씀인데, 그녀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앞에서 어리석게도 죽음의 길로 돌아섰던 본보기입니다. 사해 아래쪽 소돔과 고모라 옛 터를 가면 소금 기둥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런 롯의 아내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는 얘기입니다.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한 침상에서 하나는 구원을 다른 하나는 저주를 받는다거나, 함께 같은 맷돌질을 하다가 그렇게 황망히 갈라서게 된다고 하니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란 말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살아도 제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내일 수능에 참가하는 자녀나 손자들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라고 권고하십시오.
3. 그제 교보에 들려 양창순님의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를 사서 읽고 있습니다. 흥미진진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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