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58호(2024. 7. 13. 토요일).
시편 시 73:10-12.
찬송 43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박지원의 <낭환집서/蜋丸集序>에 나오는 얘기다. 술에 취한 쾌남아 임재가 가죽신과 나막신을 짝짝이로 신고 술집 문을 나선다. “나으리 취하셨군요. 신을 짝짝이로 신으셨어요.”하자, “내가 말을 타고가면 길 왼편에서 본 자는 가죽신을 신었군 할 테고, 오른 편에서 본 자는 가죽신을 신었군 할 테니, 뭐가 문제냐?” 어떤 가? 사람들은 말 위에 탄 사람의 신발을 보고 반대편도 그러려니 한다. 결국 진실게임을 하다가, 말에서 내리면 둘 다 머쓱해 진다. 서로가 본 것은 분명 가죽신이었고, 또 나막신이었다. 가죽신과 나막신을 짝짝이로 신을 미친놈을 생각지 못하는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왼쪽 오른 쪽만 있는 게 아니다. 중간이 있다(시비재중/是非在中). 그걸 찾지 못하는 오늘의 세대가 참 아쉽다.
정 민, 옛 사람이 전한 네 글자, pp.132-133. 박성완, 24. 7. 11.
2. “부활에 대한 토론(23-33절)”과 “첫째가는 계명(34-40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 “부활에 관한 토론”입니다. 부활 논쟁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주제일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힌트를 얻게 됩니다. 하루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질문을 하였는데, 그들은 B. C. 2세기경 하스모니안 왕조 때 사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다수 제사장들에 의해 형성된 유대교의 최대 당파 중 하나입니다. 종교와 정치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일종의 정치 집단이었고, 따라서 이들은 철저히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동시에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고 로마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며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바리새파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성문화된 율법(모세 오경)만을 받아들이고 구전(口傳/장로의 전승)은 거부하였으며, 그러나 납세 문제 등에 관해서는 긍정적이었습니다. 이들은 흔히 ‘물질주의자’ 혹은 ‘현실주의자’로 비유되며, 세례 요한(마 3:7-8)과 예수께 비난받았습니다(마 16:6-12). 그래서 그들은 부활이나 천사나 영생, 영혼 등을 믿지 않았습니다(막 12:18; 눅 20:27; 행 23:8). 이런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관해서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관습법인 수혼법(신명기 25장 5-10절)을 근거로 절대로 천국에서 형제간에 마누라 시비로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두개인들은 아랍세계에 만연한 수혼법을 들어서 그보다 더 중요한 부활과 영생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관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훼손하는 어리석은 해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천국에서는 시집 장가가는 제도가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종종 이런 사례 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데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차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야훼 신앙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3대 당파가 있었는데, 첫째는 율법에 철저한 바리새파, 둘째는 조금 전에 언급한 사두개파, 셋째는 에세네파인데(마 12:2; 행 15:5; 빌 3:5). 바리새인은 히브리어 ‘페루쉼’에서 유래한 말 Pharise로 ‘분리된 자’,‘분리주의자’, ‘구별된 자’, ‘거룩한’, ‘신성한’, ‘배타적인 신앙의’라는 뜻입니다. 율법을 지극히 철저하게 지키면서 불결한 것과 부정한 자들(세상,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해 나온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봅니다. 마지막으로 에세네파는 쿰란동굴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금욕생활을 했기 때문에 성경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다수는 결혼을 하지 않고 소박하게 살아가면서 자신들을 '남은 의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사해 두루마리라고 불리는 고문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가장 오랜 성서의 일부분과 주석을 우리에게 전해준 셈입니다. 에세네파는 성서에 나오지 않지만, 에세네파는 사해 두루마리의 저자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여러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행전 23장은 바울을 고소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자중지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행 23:1~10)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한목소리로 고성을 지르며 금방이라도 바울을 집어삼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던진 한마디로 인해 바울에게 향하던 비난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급반전됐습니다.(행 23:9)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인 것과 자기가 신문을 받는 이유가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행 23:6)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갑자기 바울을 옹호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반전이 일어난 이유는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갈등 때문이었을 알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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