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55(2024. 7. 10. 수요일).

시편 시 73:1-3.

찬송 4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웅 숭배론>의 저자 토마스 칼라일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빈곤을 많은 이들이 견디나, 부귀에 견디는 이는 적다.” 가난하거나 성공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에게서 겸손이나 도덕성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유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성공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은 언제나 당당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약한 사람으로 계속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강한 사람으로 역사에 얼굴을 내밀 것인가? 보통 사람이라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아픈 생채기들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닐까?       박성완, 24. 7. 9.

 

2.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33-46)”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야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이 타락하도록 그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운 이가 바로 사탄이었는데, 그는 처음부터 선악과를 먹게 될 때의 결과를 알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이라 일러주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유혹은 줄기차게 계속되었고, 마침내 바벨탑을 쌓는 일에까지 발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런 또 다른 일화에 불과합니다. 그 과정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친 다음에 높이 망대를 세우고, 이 포도원을 여러 소작인들에게 도지(賭地)로 주고 맡기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포도 철이 되자 주인은 당연히 약속한 도지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는데, 험한 꼴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때리고 죽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다음 해에도 또 도지를 받으려고 종을 보냈는데 첫해처럼 종들을 때리고 죽여 버린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보낸 것은 자신의 아들이었는데, 이들은 상속자로 판단하고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그 악행을 저지른 소작인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고 도조/賭租를 제대로 낼 소작인들에게 맡기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소작인들은 자신의 일을 해야 하는데, 그들의 야망이 소작인에서 주인의 자리로 가장 쉽게 발전하는 야망이 주인과 같이 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악행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곤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된 성경을 인용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도조를 잘 내는 사람, 곧 자신의 역할을 넘치지 않는 사람에게 허락될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 위에 떨어지거나 아래 깔리는 사람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 천명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제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한 말씀으로 알고 예수님을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어제 소개드렸던 <지옥은 없다>를 쓴 작가는 현대 크리스천들의 안일하고 나태한 신앙생활에 충격 요법을 주기 위해서 지옥도 천국도 없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러니까 지옥과 천국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반어법으로 또는 충격을 쓰게 것입니다. 히틀러도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천국에 가 있다는 충격 요법을 쓴 까닭은, 맹목적인 기독교 신앙, “예수 천당, 불신 천국이라는 현대 기독교회의 굳어버린 교리 구조를 깨트리는데 있다고 생각하였고, 건강한 기독교 신앙 구조를 세워야 한다는 의도였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 책의 저자인 프랜시스 챈(Francis Chan) 목사는 미국에서 건강한 교회로 급성장하고 있는 코너스톤교회(Conerstone Community Church)를 개척한 주목받는 차세대 리더라고 합니다. 이런 반어법적 혹은 충격요법의 외침은, 천국에는 목사들의 혀들로 가득 차 있다거나, 세상에서 유명했던 목사들은 천국에서 찾을 수 없더라는 등 오래된 충격요법이 무디어 버리자, 한 단계 더 오른 요법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들을 귀가 있도록 열망하며 힘씀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더욱 강한 충격요법을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전해야 할 말씀은 흔들리지 않는 말씀의 순수성입니다. 자칫 기독교 구원이 도덕적인 행실로 가늠되거나, 예수 구주라는 간단한 고백으로 통과된다는 구원의 가르침은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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