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51호(2024. 7. 6. 토요일).
시편 시 72:8-10.
찬송 13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피파의 노래>라는 시로 유명한 로버트 브라우닝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슬픔은 아주 오래된 즐거움인지 모른다.”
우리는 낯선 일들을 만날 때 그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라고 하면, 당황해 하거나 불평하곤 한다. 시험에 계속 낙방하거나 취직 면접에서 계속 탈락을 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실패를 여러분 맛보았던 사람들은 긴 삶의 여정에서 보면 나쁜 추억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멋진 추억이라고 회고한다. 그래서 어른들이 필요하다. 당장은 두렵고 서럽고 절망스럽지만, 숨을 깊이 들이 쉬고 조금 더 기다리다 보면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박성완, 24. 7. 5.
2. “예루살렘 입성(1-11절)”을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변두리를 맴돌던 예수의 선교활동은 드디어 소위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내용입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을 돕는 선교활동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잘 알려진 비밀이었습니다. 예수의 활동은 당시의 종교계는 물론 정치 당국자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대중을 몰고 다니는 최대의 그룹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거침없는 설교는 종교가들 뿐 아니라, 식민통치를 하는 빌라도 총독이나, 로마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는 헤롯에게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을 것이며, 언젠가는 반드시 빌미를 잡아 혼쭐을 낼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현장 중계를 하듯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전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종교계나 정치계에 오해를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시국을 비판하는 학생들의 가장행렬/假裝行列 이라고 하면, 처음부터 그런 시각으로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왕의 행렬이라고 밖에는 다른 말을 할 수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준마를 대신한 나귀 새끼를 타고, 붉은 카펫을 대신한 사람들의 외투를 길에 폈고, 손과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왕의 자비를 구하는 구호대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친 것 등은 왕의 행렬을 연상하게 하기에 충분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질문했습니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의 뜻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비록 왕의 행차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 빌라도 등 정치지도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를 리 없는 예수 일행은 어찌하여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진한 민심을 뒤흔들었다고 비난받을 일을 꼭 그렇게 요란을 떨 필요가 있었을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준비는 기획하고 진행한 분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점은 명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차 내용에는 따르는 무리들의 외침에서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가 그 문제의 외침입니다. 호산나라는 히브리어는 “우리를 살려주소서!” 또는 “우리를 구해주소서!” 라는 뜻입니다. 가벼운 도움을 구하는 말이 아니라, 잘못된 정치나 경제 또는 종교로부터 구해달라는 생명과 관계된 심각한 구조 요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들을 구원할 분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구호라고 읽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장차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심판자 예수의 행차임을 암시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희미하지만 그런 심판의 예고로 알려주시고 계시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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