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60(2024. 7. 15. 월요일).

시편 73:16-17.

찬송 444.

 

1.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 올 때, 나라고 왜 그 나무를 없앨 생각을 안했겠는가. 그러나 내가 먼저 그 말을 꺼내는 게 두려웠다. 나무가 들은 건 아니라도, 직접적인 가해자가 되긴 싫었다. 나는 매사에 그렇게 적당히 비겁하다. 그래서 나무가 베어질 때도 가까이에서 간섭하지 않고 비켜나 있었다.” 박완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p.135.

    살아오면서 얼마나 당당하게 살았던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대단한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비겁했고, 주눅 들어 있었으며, 그 무서운 순간이 끝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박성완, 24. 7. 14.

 

2. “위선자에 대한 책망(1-12)”을 읽었습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서울 아파트에는 경비 직원이 있고, 청소하는 직원이 있는데, 경비직원들은 경비와 함께 주민들의 민원사항(전기 고장 기타)을 들어주느라, 그런대로 만남이 있지만, 청소하는 직원은 자신이 맡은 구역을 쓸고 닦는데 아침과 저녁으로 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전체 아파트 3개동을 오가며 밖에 있는 쓰레기 일체를 정리하고 치우는 역할을 하는 노인 한 분이 계십니다. 제 또래 정도 되는데, 참 성실하십니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뜨거운 시간을 피해서 온갖 더러운 것들을 치우시는데 고맙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빵을 사들고 올 때는 경비실은 물론 그 영감님을 찾아 한두 개를 드리곤 합니다. 많은 생각을 갖게 하시는데, 주민들이 볼 때만 하는 일이 아니라, 내게 맡겨진 소중한 일터이기 때문에 정성과 열심을 다하시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저의 매부 한 분도 정년을 마치고 아파트에서 경비직원으로 일하는데, 자존심이나 나 때는하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하니까 마음 편하다고 하십니다. 장로로 은퇴까지 하셨으니 평생을 일 속에 파묻혀 사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위선/僞善에 관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대상으로 삼은 이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은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에게도 모두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들은 바른 말이라는 뜻입니다. 위선이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꾸며낸 선행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에는 또 다른 위선의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테필린/Teffilin으로 성경의 네 구절(13:1-10, 11-16; 6:4-9; 11:13-21)이 기록된 양피지를 담아 넣은 사각형 모양의 작은 가죽상자를 지칭한다. 처음엔 이 상자가 매우 작았는데, 차츰 커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졌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졌다는 말입니다. 속사람보다는 겉 사람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모든 복장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위선자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심각한 문제는 가장 신앙심이 깊다며 자랑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설교나 강연은 너무도 청산 유수였습니다. 그리고 감동적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 아까운 재물을 헌금이라며 내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말은 듣고 지키지만,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말입니다.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말은 듣고 행실은 듣지 말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신앙심을 표현하는 온갖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닐 뿐 아니라, 잔치 자리나 회당에서는 항상 맨 높은 자리에 앉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즐기며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중심부로 향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으뜸가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자신을 높이려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만이 높아진다고 말입니다. 어느 점잖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소위 성공했다는 친구는 친구들에게서 조차 온갖 좋은 호칭으로 불리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고, 재력과 능력을 과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동문수학했던 친구들의 비굴함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렇게 해서 이런저런 콩국물을 받아 마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훌륭한 일을 하고도 존경받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옛 스승까지 재물에 눈멀었다고 비난하는 모습에는 정이 떨어졌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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