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62호(2024. 7. 17. 수요일).
시편 73:21-23.
찬송 341장.
1.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거시겠습니까?” 어느 대선 후보 경선장에서 나온 얘기라고 합니다. 거짓말 논쟁의 마지막 멘트라고 합니다. 우리는 거짓말이 남발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빨간 거짓말입니다.”라던 한 대통령의 말은 어떤 결말을 가져왔습니까? 거짓말을 부끄러워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2. “위선자들을 향한 저주의 말씀(28-36절)”을 읽었습니다. 27-28절에서는 회칠한 무덤 같은 위선자들에게, 그리고 29-36절에는 예언자와 성자의 무덤과 기념비를 열심히 조성하면서, 자신들이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이런 비극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나마나 한 말을 늘어놓지만, 사실 이 말은 자신들이 예언자들과 성자들을 죽인 사람들의 후손임을 실토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런 위선자들을 주님은 뱀 같은 자들, 독사의 족속이라 규정하고, 그들이야말로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낸 예언자와 현인 그리고 학자들을 보냈지만, 너희는 그들을 죽이고 십자가에 매달고 채찍질하며 그들을 찾아 온 마을을 뒤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죄 없는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에서 살해된 스가랴의 피 값이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대한 저주의 말씀(37-39절)”도 언급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누리던 예루살렘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섬기고 존경해야 마땅한 예언자들과 그들에게 보낸 하나님의 일군들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율법학자라고 하면 오늘날 신학대학 교수 정도로 생각할 수 있고, 바리새파 사람들이란 유대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정통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렇게 주님의 노여움을 사서, 저주받은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종교계에서건, 비종교계에서건 가끔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일지 모르겠습니다. 첫째로 이런 분들은 유대교 율법을 제대로 깨우칠 뿐 아니라, 미망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율법의 의미와 정신 그리고 목적을 가르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복판에 자신이 서 있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이란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를 대표하는 4가지 파벌의 하나로, 약 6천 명 정도로 이는 전체 유대인의 7%에 해당되었으나,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는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다가 주님의 노여움을 넘어 저주의 대상이 되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상상력을 동원해 보았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더 열심 있고, 철저한 삶을 살고 싶어 하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대단한 각오와 결심을 하고 들어선 길에서는, 그들이 생각한 만큼 어떤 성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깨우침의 경지에 이른다거나, 신앙의 열정을 너머서 확신의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실망은 하루하루 커지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의 시선도 따갑게 느껴졌고 말입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선배들의 모습 말입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내적인 감격이나 확신보다는 외적인 모습에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 선배들의 모습이었으니까요. 이게 아닌데 라고 말은 하면서도 차츰 차츰 외식하는 자가 되었고, 위선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위선적인 삶이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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