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80호(2024. 11. 12. 화요일).
시편 91:7-9.
찬송 32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생도의 노트 위에, 나의 학교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쓴다, 너의 이름을.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백지 위에, 피 묻은 돌, 휴지, 재 위에, 나는 쓴다 너의 이름을. 황금빛 얼굴 위에 용사들의 무기 위에 그리고 왕관 위에 나는 쓴다. 너의 이름을” 프랑스의 저항시인 P. 엘르아르(1895.12-1952.11)의 <자유>라는 시입니다. 자유를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도 값진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자유는 잃은 다음에야 그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 합니다.
2. “야훼께서 오실 날(14-18절)”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하나님의 일꾼인 선지자나 예언자들은 달콤하고 듣기 좋은 말 보다는 대부분 험한 말을 많이 하는 특징을 가지는데, 꼭 그랬어야 했느냐고 묻곤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어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역사를 비판적으로 보는 선지자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구미를 맞추는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들도 축복의 말을 많이 하였고, 앞으로 모든 일들이 잘 될 것이라는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말들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축복이 넘치는 말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들이 아니었습니다. 우상 숭배와 불의와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해서, 축복의 말보다는 더 시급한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책망과 저주의 말이 그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가 잘못된 방향으로 질주한다고 하면, 그때는 교회가 앞장서서 잘못된 방향으로 달음질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야훼의 날, 곧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찾아오시는 날은 하나는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와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 정황을 보고 야훼가 오시는 날이 어떤 날이 될 것이라는 것쯤은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처럼 죄가 관영한 시대라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1972년 연세대학 창립기념일에 총학생회가 준비한 가장행렬에는 신과대학이 <예수 서울에 오시다>는 매우 시사 하는 바가 심각했습니다. 김포 공항에 비행기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한국 기독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일본의 복음화율이 1%미만이니 그리고 가시라고 권합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나는 한국을 보러왔다고 하시자, 그 유명한 추기경을 비롯해서 대형교회 목사들이 달려들어 예수님을 떼밀어 비행기 안으로 던져 넣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좋은 소리를 하시지 않을 것을 눈치 챈 때문이었습니다.
야훼께서 오실 날은 어떤 날이 될까요? 상을 주시는 날이나 축복을 부어주시는 날일까요? 아니면 그와는 정반대로 책망을 하시거나 심판을 하시는 날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그 날이 무서운 날이라고 말씀하시며, 득달같이 다가오는 날이라고 하십니다. 대처하거나 준비할 겨를도 주지 않고 들이닥칠 날이라고 말입니다. 변명도 잘하고 감추기도 잘하는 이력이 난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이상 우는 소리 변명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야훼의 날은 야훼의 분노가 터지는 날, 폭풍에 휩쓸려가는 날이라고 하십니다. 저는 가끔 미국을 초토화시키는 토네이도를 떠올리기도 하고, 일본을 수시로 찾아오는 지진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항상 대비하고 살고 있으면서도 번번이 그리고 심각하게 당하기만 하는 재난들 말입니다. 일본이나 미국에 악한 사람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일어나는 저주는 아닐 것입니다. 일벌백계라는 의미가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벌을 받는 사람은 물론 그걸 지켜보는 구경꾼들까지 모두 정신 차리라고 말입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을 몰아칠 것인데, 피를 땅에 뿌리고 배알을 거름덩이처럼 쏟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까닭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은과 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난/亂을 면치 못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야훼의 날은 책망을 넘어서서 저주의 날이었습니다. 그랬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선지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그들의 글을 읽기 싫어하는 까닭을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을 자주 들어야 합니다. 어머니의 잔소리를 자주 들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누구도 잔소리하지 않는 바로 그 날이 절망으로 직행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음성이 여러분의 귓가를 울리기를 바랍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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