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473호(2010. 11. 19. 금요일).
시편 시 13:1-2.
찬송 2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로 찾기 놀이를 할 때 보면, 우선 연필부터 들고 죽죽 그어가면서, 벽에 부딪히면 다시 돌아 나오기도 하면서, 길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고요. 반대로 가만히 눈으로만 먼저 풀어 보는 사람도 있지요. 일단 몸으로 부딪혀 보면서 문제를 풀고 즐기는 사람들, 머리로 문제를 다 풀어본 다음에, 지름길로 단 한번 만에 움직이는 걸 즐기는 사람, 이렇게 나뉘는 것 같습니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렇게나 다른 방식으로 인생이라는 미로를 풀어 나가는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르바는 작가가 직접 만난 체제의 인물이기도 하지요. 작가는 조르바에게서 자유인의 초상을 보았다고도 말합니다. 그는 생이라는 미로는 직접 몸으로 부딪혀 가면서 풀어나가야 된다는 그런 사람이었지요. “확대경으로 보면, 물속에 벌레가 우글우글한데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을 확 부수어 버리고 물을 마시겠소?” 몸소 겪어서 얻은 조르바의 삶의 지혜는 이렇게나 투박하고도 간결합니다. 사람에 대한 판단도 날렵하지요. “사람에게는 바보 같은 구석이 있게 마련입니다. 가장 바보 같은 놈은, 내 생각에는 바보 같은 구석이 없는 놈일 것입니다.” 이렇게 거침이 없습니다. 머리만으로 생의 미로를 풀어나가는 데 익숙한 작가로써는, 그런 조르바의 말이나 또 원하는 곳을 향해서 곧바로 몸을 날리는 민첩함이 실로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야 말로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면요, 그런 찬사야말로 작가 자신은 절대로 조르바가 될 수 없다는, 그런 자조의 소리 같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생각과 배움을 통해서, 별 큰 시행착오 없이 생의 미로를 풀어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원하는 걸 향해서, 몸을 사리지 않고 그냥 뛰어 들 수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해 보면, 그 쪽이 막혀 있다는 게 빤히 보이기 때문에,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때도 많았겠지요. 그래서 카잔차키스의 조르바 예찬은 어쩌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세계에 대한 예찬으로도 보이는데요. 내가 가지 못한 내가 갈 수 없는 길을 가는 사람에 대한, 동경 부러움 같기도 하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0년 11월 9일 방송>
2. 창조자를 기억하는 일,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근본을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자기 발견의 첫 걸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낙심할 때, 그 반대로 너무 자고(自高)할 때가 그런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 4학년 때 초가집 툇마루에 누워 양광(陽光)을 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누굴까? 나를 나으신 부모님은? 그리고 조부모님은? 누가 이 분들을 낳으시고 보내셨을까? 그래서 모태신앙이지만 하나님이 나의 근원이심을 굳게 믿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청년의 때에 자신의 근원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엮어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신의 성공만이 아니라, 자신과 연대하는 가족과 이웃들을 잘 살피는 그런 마음씀씀이도 생겨날 테니까 말입니다. 며칠 전에 공자님에 관한 책 소개를 했습니다만, 그 분은 사람과의 뿌리나 관계를 생각하기에 머리를 쓰기도 모자란다고 했으니,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갈 여유가 없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유는 그 방법상의 차이일 뿐 서로 통하는 데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자님을 비롯한 일반인들은 자기 주변부터 차근차근 위로 찾아 올라가는 방식이지만, 우리들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찾아 내려가는 방식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가능하지만 몸이 따르지 않을 그 날이 오기 전에, 청년의 때에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것들이란, 창조자를 기억하며 사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3. 도봉산을 내려오면 밥집들과 옷집 들을 지나 개울가를 따라 가다보면 <소백산> 오리집이 나옵니다. 목사인 것을 알아본 주인이 정성껏 찬을 내놓곤 합니다. 그 집의 동치미는 일품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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