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612(2011. 4. 7. 목요일).

시편 시 48:9-14.

찬송 9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고 싶은 말 참 많습니다. 하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 역시 많지요. 한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는 그 딴 일 하면서 뭘 그리 힘들어 하느냐?” 하는 말이 높은 순위에 있었습니다. 어렵지도 대단치 않은 일을 하면서 힘들어 하다니, 무능력 하거나 시시한 사람이라는 느낌이니, 듣기 좋을 리 없겠지요. 말을 떠나서 타인의 일을 쉽게 생각하거나 시시하게 여기는 태도처럼 언짢은 것도 없습니다. 그런 만큼 그 반대되는 장면, 비록 소설 속에서지만 이런 장면을 대하면,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참으로 커지기도 합니다. 소설가 김지원의 <꽃철에 보내는 팩스>라는 소설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수빈이 차를 세웠다. 농부들은 인제 오느냐며 인사했다. 전시회에 단체로 봉고차 타고 참석했던 이들이었다.” 흔히 전원생활을 꿈꾸며 시골로 내려간 예술가들은 마을 주민들과 불화를 겪거나 외면받기도 한답니다. 예술과 농사일에 대한 서로의 이해 부족과 오해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소설 속의 이 화가 주인공처럼, 더없이 따뜻하게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이웃 농부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차를 세우고, 이웃 농부들은 화가의 전시회에 단체로 가고, 서로의 일과 직업을 똑 같이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거지요. 이제는 팩스보다 휴대폰 문자 시대이지요? 꽃철에 보내는 문자 메시지로, “일하느라 힘들겠다. 그러나 힘내라.” 누군가엔가 일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한껏 담은, 꽃철의 문자 메시지 한 통쯤 보내보면 어떨까요?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1328일 방송>

 

2.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항상 주의를 가져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인식입니다. 우리는 자주 눈에 보이는 그 분의 삶의 모습만을 보고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당황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거나, “나는 하늘로써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와 같은 말씀입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씀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만났던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그런 말을 들을 때 수군수군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이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말씀을 들을 때는, 어쩌면 미친 사람처럼 취급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것입니다. 이런 모든 오해의 근원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이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이른바 기독론에 대한 신학을 분명히 가르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우려야 했습니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첫 걸음일지 모릅니다. 초대 교회는 이 점에 관한 한 분명한 태도를 유지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기초석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이야말로 흔들릴 수 없는 견고한 신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믿음이요,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과 이 고백위에 있을 때만, 생명의 떡을 제대로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오늘 오전에 강의를 끝내고 점심 후에는 시험을 봅니다. 그리고 저녁엔 한국에서 오는 동료들을 만나 차후 선교 협의를 할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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