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610호 (2011. 4. 5. 화요일).
시편 시 48:1-3.
찬송 13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살다보면 눈에서 불이 튈 것처럼 화가 나고, 뜨거운 돌을 삼킨 것처럼 가슴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날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맥베스]에서 썼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음향과 분노로 가득 찬 백치의 이야기” 이런 표현이 절로 떠오르면 말이지요. 물론 모든 분노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정당한 분노는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키는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화가 나서 화를 내는데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더 화가 치밀어 오를 때입니다. 나를 화나게 한 일보다 내가 그 일에 화를 내게 됐다는 사실 자체가 더 분노가 돼서 상처를 내고 만 거지요. 왜 참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했을까? 나는 왜 자그마한 일에도 분노하는가? 이런 자괴감이 밀려옵니다. 인지행동 치료의 대부라고 불리는 앨버트 엘리스는, 분노라는 감정을 잘 느끼는 사람에게서 독특한 심리적 특성을 발견 했습니다. 삶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몹시 중요하게 여겨서, 이분법적인 정의 절대적인 정의를 내리는 그런 경향이 있다는 거지요. 또 그렇게 만든 계율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때, 분노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계율이 정교하면 정교할수록, 다른 사람에게 엄격하게 그 계율을 부과할수록, 또 다른 사람의 삶에 깊숙이 개입할수록, 분노할 일은 점점 더 많아집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옳고 선하고 절대적이라고 믿는 가치도, 상대방에게는 그다지 의미 없는 것일 수 있지요. 나에게선 소중한 것이 상대방에게는 별 것 아닐 수 있다는 것, 참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고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앨버트 엘리스는 충고하네요. 그런데 아직 그런 인격을 갖추지 못했는데, 분노를 참기 힘들다면 말이지요. 잠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흉내 내 보는 걸 추천합니다. 카이사르는 평생토록 분노나 복수의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하는데요.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풀이합니다. “분노와 복수는 상대를 자신과 대등하게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고 일어날 수 있는 행위이다. 카이사르가 평생 이것과 무관했던 것은, 분노나 복수가 윤리 도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성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월한 자신이 왜 열등한 타인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들과 똑 같이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그들과 똑 같이 복수심을 불태워야 하는가?” 스스로에 대해서 과대망상을 가지고 않는 한, 율리우스 방식으로 분노를 일단 가라앉히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이 보일 것도 같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1년 3월 24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위태로울 때, 물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일화와(16-21절), 예수님을 찾아 이곳저곳을 다니는 무리들에게, 현실적인 문제(떡을 먹음)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비판적인 말씀을(22-27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일 계속해서 떡 이야기가 나오니까 오늘은 첫 번째 단락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연일 일본 후쿠오카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선 물질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자연 재해보다도 인간에 의해서 빚어지고 있는 문명의 해악(害惡)이 훨씬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인간이니까 얼마든지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문제들을 보면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인간이 악하고 또 악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무튼 바로 이런 때는 본문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형편과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과연 제자들에게 희망이란 무엇이며, 오늘 우리들에게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은 우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까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최선을 향해서 힘쓸 것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어부로 수십 년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풍랑 앞에서는 어떤 방법도 해답이 안 될 테니까요. 바로 이런 때에 주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오실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직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습니까? 저는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남아 있는 최선이 있다면, 그것은 천지를 지으신 우리 하늘 아버지의 도움을 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을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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