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24호(2012. 8. 31. 금요일).
시편 30:7-9.
찬송 52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장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일이 아니다.” 말만 놓고 보면 어떤 모진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애국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1980년대 고문기술자로 악명이 높았지요. 스스로는 애국이라고 확신했지만, 결국 법의 심판대 앞에서 범죄자로 몰락하는 경우를 역사에선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 됐던 걸까요? 칼 아돌프 아이히만은 독일의 나치 친위대의 대원이었습니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혐의로, 1960년 5월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사드에게 체포돼서, 예루살렘으로 이송된 후 재판을 받았지요. 그리고 이 재판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본인 스스로 나치의 피해자였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아이히만은 악령이나 괴물과 다름이 없었고, 아렌트의 생각 역시 다르지 않았지요. 그러나 재판이 끝나고 아이히만의 교수형이 집행된 후, 아렌트가 뉴욕크에 발표한 기고문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 있었습니다. 이 기고문은 훗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는데요.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우리가 살면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는 법이나 규칙에 어긋난 행동을 한 적 없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하고 평범한 사람이었지요.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그는 자신이 나라의 일을 하는 공복이기 때문에, 최고 통치권자가 어떤 명령을 내리든, 그저 열심히 완수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최고 통치권자의 명령을 성실히 따랐을 뿐, 자신이 하는 일이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상처를 남길지, 어떤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남길지에 대해선 생각지 않았던 겁니다. 아렌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철저한 무사유였다. 이런 무사유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애국자로 불렸던 사람이 시대가 달라서 범죄자가 된다면,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무사유라는 뜻입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사유란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가 유대인에게는 어떤 의미와 영향을 끼칠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최고 권력자의 명령에만 성실했습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서든 진정한 애국심이 아닙니다. 영국의 정치학자 하롤드 라스키가 말했지요. “건전한 애국심은 피동적이거나 무비판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것이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6월 6일 방송>
2. 지금도 여전히 편가르기 싸움은 멈출 기세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가족이나 민족, 나라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곤 합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제가 군소교파의 목사라서 그런 콤플렉스를 가진 것인지는 몰라도, 한국에서는 장-감-성 교회만이 기독교회인 듯 자신들의 틀에서 조금도 나아가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한 때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시대의 구원자처럼 등장했을 때, 갈릴리로 대변되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만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대상인 듯 외쳐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처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시는 일화는 옥의 티처럼 생각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을 144,000명으로 제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계시록의 상징적인 수자를 자신의 생각대로 풀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a) 성경의 한 복판에 있는 이 말씀은,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을 말한다고 할 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밝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외로운 사마리아 여인 뿐 아니라, 헤롯 왕의 신하까지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계셨던 주님이셨습니다. 편가르기는 순기능과 역기승이 있습니다. 편이라는 동질성을 매개로 뭉치고 어울릴 수 있는 순기능을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센카쿠열도를 두고 중국 백성들과 일본 백성들이 뭉치는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해묵은 민족감정까지 부추기는 현상입니다. 결국 누가 언제부터 그곳에서 살았는가? 라는 역사적 근거로 판정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편가르기가 분쟁이 될 때, 그리고 20세기처럼 전쟁으로 비화할 때, 그 피해는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편 가르기의 역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함께 만족할 수 있는 중재안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땅의 소유권이란 개인이 아닌 나라라는 사회주의 국가의 관행을 조금 발전시켜서, 톨스토이의 주장처럼 땅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 아닙니까?
3. 8월은 분주하게 막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꼭 잊어서는 안 될 것들, 소중한 것들은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을 때만 이해되는 진리. / 요 5:19-29. (0) | 2019.05.11 |
---|---|
38년동안 마음을 바꾸지 않은 사람. / 요 5:1-8. (0) | 2019.05.11 |
소명에 일치하는 삶이 되어야. / 요 4:27-42. (0) | 2019.05.11 |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기를. / 요 4:1-26. (0) | 2019.05.11 |
세례 요한을 통해서 다시 배우는 자기 정체성. / 요 3:22-36. (0) | 2019.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