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27호(2012. 9. 3. 월요일).
시편 31:4-8.
찬송 34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란 자고로 같은 실수를 두 번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백설 공주는 한 번도 아니고 같은 실수를 몇 번이나 거듭 하지요. 그 실수란 바로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방물장수 할머니였어요. 반갑게 문을 열어주고, 기꺼이 집안으로 불러들여서 예쁜 리본을 구경하다가, 숨통이 조여서 기절하는 변고를 당하고 맙니다. 일곱 난쟁이들이 얼른 달려 왔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 했지요. 그런 일을 한번 겪었으면, 다음부터는 조심해야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다른 장사꾼한데 문을 열어주어서 또 죽을 뻔 했고요.
결국 세 번째는 독이든 사과를 먹고, 이번에는 정말로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버립니다. 백설 공주는 왜 자꾸만 문을 열어주었을까요? 박현희의 [백설 공주는 왜 자꾸만 문을 열어줄까?]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이런 부제가 붙어 있는데요. 저자는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이 백설 공주가 이해가 됐다고 합니다. “백설 공주는 외로웠던 것이다. 난쟁이들과 함께 살게 된 백설 공주의 하루는 어땠을까? 그는 난쟁이들이 일터로 나간 사이에 혼자 집안일을 한다. 혼자서. 외로움은 난쟁이들이 백설 공주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느냐 와는 관계가 없다. 친밀한 경험을 공유한 사람과의 교류 없이 지내는 백설 공주의 일상을 생각해 보라. 그러니 아무리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백설 공주는 열 번 스무 번 문을 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백설 공주의 일상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지요. 바로 관계입니다. 그 결핍을 리본이나 머리빗사과 같은 물건을 구매하는 소비로 채우려고 합니다.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관계의 결핍이 소비로 이어지는 일들을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발견한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왜 계속 새 옷이 필요한가? 옷장에는 옷이 차고 넘치는데, 왜 또 새 옷을 사고 싶을까? 멋진 새 옷의 용도는 두 가지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만족스럽기 위해서.” 이미 스스로 만족스러운 사람은요, 굳이 남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관계는 진실하다고 보기 힘들겠지요. 그러니 과소비를 할 염려도 없고, 낯선 사람에게 쉽게 현혹당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백설 공주는 너무나도 외로웠던 겁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6월 1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친 아버지라고 하는 등,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로 진술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행한 설교의 한 부분입니다(18절 참조). 그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친히 보셨다는 점(19-20절), 하나님처럼 당신 자신도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점(21절), 심판의 전권을 하나님께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점(22, 26-27절), 하나님처럼 공경 받을 자격이 있다는 점(23절), 하나님과 그의 보냄을 받은 아들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점(24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게 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점(25절),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다는 점(28절)입니다. 아마도 이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모두 충격적으로 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말씀하는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주 농아 목회자 강습회에서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물론 쉬는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말입니다. 그 중에서 3위 1체에 대해서 명쾌한 대답을 요구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제 대답은 성경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일관되게 하나님은 한 분 뿐이라고 말씀하신다는 점(신 6:4-5),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구속자이신 아들 예수님을 구별하고 있는 점(요 5:19-27), 예수님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활동하실 것(요 14:16-17)을 말씀하심으로 한 분이시며 3가지 역할을 담당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어서, 이를 정리하면 3위 1체이신 하나님을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고 말입니다. 물론 이런 성경의 진술은 믿음으로 밖에는 수용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이해는 이를 받아들이기에는 그 품이 좁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늘이 언제나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언제나 높음을 얘기했던 이사야의 진술을 소개했습니다(사 55:8-9). 인간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다 품을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이를 두고 어거스틴이 “믿기 위해 이해하려말고, 이해하기 위해서 믿으라.” 고 한 명언도 귀띔해주었습니다.
3. 어제 오후에는 3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1시간 30분짜리 강의를 하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벌써 2달 전에 한 약속이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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