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83호(2012. 10. 29. 월요일).
시편 43:4-5.
찬송 2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자 친구는 평소에 화장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옷도 크게 신경 써서 입지 않습니다. 여자들 특유의 꾸밈새에 대체로 무관심한 편입니다. 하지만 손톱만은 예외입니다. 손톱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유난스럽습니다. 늘 깨끗이 다듬고 매니큐어색깔도 파란 색이나 검정색 노란 색같이 눈에 띄는 색을 바르곤 합니다. 처음 소개받은 자리에선 그 부조화에 내심 놀랐었습니다. 맑은 맨 얼굴에 손톱은 그렇게 진한 색이라니. 자신은 요즘 세대답지 않게 다소 보수적인 편이지요. 오늘은 예의를 다해 즐겁게 보내겠지만, 다시 만나자고 할 마음이 이미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던 중, 그녀가 무심코 어머니 얘기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2년째라고 합니다. 살아계실 때 어머니는 미장원을 하셨다고 합니다. 머리만지는 일 못지않게 꽃을 가꾸는 일을 좋아하셔서, 미장원 입구에 작은 화단이 넘치도록 꽃과 화분을 가꾸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미장원이 아니라 꽃집인줄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어머니 미장원에도 손님들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다 아이도 여자 친구를 포함에 넷이나 됐습니다. 늘 바빠서 점심이나 저녁을 거르는 날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미장원일 중에서 제일 좋아했던 일이 바로 손톱 다듬어 주고 색칠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은 그것만 따로 하는 곳이 생겼지만, 여자 친구 어머니는 그 일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계속 서서 일하던 어머니도 그 일을 할 때는 좀 앉아서 쉬는 기분이었답니다. 더욱이 꽃을 좋아하던 어머니는 손톱에도 이런저런 예쁜 색깔을 바르는 것도 마치 꽃을 피우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손톱을 내미는 손님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신 뒤, 여자 친구는 그 슬픔과 그리움에서 헤어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 힘겨움을 이기기 위해, 오히려 어머니를 날마다 늘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8월 13일 방송>a.
2. 요즘 부쩍 복음이라는 말과 율법이라는 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오전 예배를 마치고 교우들과 점심을 나누는 자리에서 제 앞에 앉아계신 목사님께서 제가 쓴 <교회가>의 구절에 시비를 거셨습니다. “우리들이 해야 하고 해선 안 될 율법과” 라는 문구를 고쳐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해야 하고 할 수 없는 율법과”로 말입니다. 그 분의 생각은 율법이라는 아무리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뚱맞게 질문을 날렸습니다. “율법이 뭔데요?” 돌아온 대답은 “몽학 선생이요.” 이었습니다. 통쾌, 유쾌, 상쾌한 우문에 현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제가 변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과제물이라고 봐요.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에 관한. 맞습니다. 율법이 아무리 강요할지라도, 결국은 절망하게 만들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는 게 최선의 역할이겠지요.” 라고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율법주의자는 아니어도 비슷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말뿐인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인간답긴 합니다. 그러나 몽학선생의 역할을 모르고 있는 것이 슬프고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신앙을 변호하는 사도의 증언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역시 이런 신앙 변증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다가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등등 말입니다. 비록 생명을 담보로 하는 사도 같은 변증이 아니라고 해도 말입니다. 사도의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는 것이었습니다(8절).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 어떤 고상하고 감동적인 말도 아무 소용없는 신앙이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런 다음에 사도의 신앙은 어떻게 전환점을 맞게 되었는지를 밝힙니다(9-18절).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난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서는 바로 이 점에서 취약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저 같은 모태신앙인들에서 말입니다. 왜 믿느냐는 물음에, 그냥 믿지요 라고 대답들을 할 뿐이니까요. 사도처럼 극적인 전환점이 없다손 치더라도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는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고민한 과제가 아닙니까?
3. 제가 10여 년째 공동집필하고 있는 [2013년 예배와 강단]이 출간되었습니다. 교회력에 따른 설교연구서라는 점에서 목회자들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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