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427.

시편 시 104:6-9.

찬송 42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빗소리는 참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빗소리는 비 자체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 어딘가에 부딪혀서 나는 일종의 마찰음이지요. 그렇게 부딪혀서 나는 소리인데도, 아프게 들리지 않고 예쁘게, 또 때로는 시원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 사람과 사람의 일도 그와 같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 장 폴 브르가 엮은 [아메리카 인디언]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반대 되는 것들과 대립하는 것들에는 마음을 쓰지 말. 그것들은 세계를 나누고 세상사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세상을 이렇게 보는 것이 갈등과 고통과 끊임없는 투쟁의 근원이다. 밤은 낮의 적이 아니며, 죽음은 삶의 적이 아니다. 무지개가 서기 위해서는 불과 물이 만나고 햇빛과 물방울이 만나야 한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41일 방송>

 

2.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유명한 논문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누릴 자유에 대해 성찰하는데 귀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루터는 오늘의 본문에서 그 진리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을 저는 <깨어있는 신앙생활>이라는 말로 해석하고 싶었습니다. 깨어있는 신앙이란, 제대로 된 자유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억매이지 않은 자유를 말합니다(1).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에 혹은 무엇엔 가에 붙잡혀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자신의 의지나 양심에 따라 살지 못하고,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거나 매여서 살고 있다고 하면, 그는 참 자유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질에 노예된 이들이나, 시간이나 일에 붙잡힌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들에 붙들려서 살고 싶은 꿈을 누르거나 억지 삶을 사는 한 자유인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종노릇 하지 말고 자유를 누리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만물을 다스릴 만물의 영장으로(masterpiece) 이었는데, 오히려 그 만물들의 지배를 받는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도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도를 통해서 이 진리를 깨우친 루터는 참 자유인이 바라 볼 새롭고 아름다운 세상이야말로 깨어 있는 신앙일 것입니다.

 

기쁨으로 누군가를 섬길 수 있는 자유입니다(13).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어떤 누구나 무엇에게도 종노릇할 수 없는 한없이 위대한 존재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행사할 자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기려고 낮아진 종이 될 자유가 있다고 하십니다. 매우 역설적인 말입니다. 누구에게도 묶이지 않은 자유인으로써, 자신의 의지와 양심에 따라서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이라면, 반드시 병들고 약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종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주님은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36-37). 억지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할 때,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겠습니다.

 

자유인이면서 종이 되는 균형잡힌 신앙생활입니다(16-17).

신앙생활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치우칠 때이고, 그리스도 밖에 머물러 살고 있을 때입니다. 사도는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권고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자유인으로 살고 싶은데, 또 누군가를 섬겨야만 할 때, 갈등이 생기고 회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흔들리는 순간에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성령을 좇을 때 편안한 마음은 물론 새로운 힘과 용기가 생겨납니다. 그것을 사도는 성령의 열매라고 정의했습니다. 성령을 좇는 균형잡힌 삶을 살게 될 때, 사랑-기쁨-화평-오래 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와 같은 열매들이 맺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성령을 좇는 일은 의무적인 삶(율법적)에서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 맡기는 삶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성령의 임재와 도우심을 구하는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3. 오늘은 루터대학교 총장님이 설교자로 오십니다. 그래서 은혜받을 준비만 하면 되는 호사부릴 날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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