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764호(2019. 11. 23. 토요일).
시편 50:1-3.
찬송 45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봄의 어린이>는 이중섭이 1953년에 그린 작품입니다. 그의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 바로 어린이였지요. 특별히 이 그림은 봄을 배경으로 합니다. 땅에서 솟아난 들풀, 나무에 핀 꽃, 열을 지어서 어디론가 가는 개미, 날다가 붙잡힌 나비, 하늘에는 뭉게구름, 벌거벗은 어린이들이 자연과 하나가 돼서 즐겁게 뒹굴고 있는 곳은 언덕, 아니 봄, 아니 낙원입니다. 그리고 봄의 어린이들은 키가 빨리 자랍니다. 흔히 봄을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풀이나 꽃, 나무들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성장발육기에 있는 어린이들은요, 봄과 여름에 키가 자라고 가을과 겨울엔 체중이 는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봄은 오장육부의 대사활동이 활발해지는 계절이라서, 봄부터 초여름까지 키가 가장 많이 자란다고 합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자고 일어나면 키가 쑥쑥 자라는 어린이들을 보고, 봄날 죽순 자라듯 한다 했는데요. 그 옛말이 일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나타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요. 봄이 되면 부쩍 피곤해 하거나 식은땀이나 코피를 흘리기도 하고요. 또 한 곳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산만하거나 멍해지기도 하는데, 몸이 허약해서 성장의 기운을 따르지 못하고 나타나는 증세, 즉 춘곤증이라고 합니다. 또 입학이나 새 학기처럼 주변 환경이 달라지는데서 오는 스트레스도 적지 않게 작용을 하고요. 그래서 봄에는 더 충분한 영양 섭취가 필요한데요.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충분히 성장하지 못할 뿐 아니라, 체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또 체력이 약해지면 아무래도 신경질이 많아질 수 있지요. 그런데 봄이 돼서 활발해서 신진대사가 키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춘곤증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비슷하게 찾아옵니다. 자, 그럼 춘곤증을 물리칠 수 있는 좋은 음식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먼저 쑥은 지방 비타 민 A와 C 지방 섬유질 철분 당질 등이 골고루 함유돼 있어서요. 유익한 식품으로 꼽힙니다. 그리고 냉이는 식욕을 잃었을 때 입맛을 돋게 하고요. 고들빼기는 비타민 A와 미네랄이 풍부해서 눈 건강에 좋다고 하네요. 또 달래는 칼슘과 미네랄이 많아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기운은 보충해 주는 효과가 있고, 특히 숙면을 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모쪼록 이 봄에 어린이들은 자랄 수 있을 만큼 쑥쑥 잘 자라고, 어른들은 부디 체력이 모자라서 신경질이 는다고 하는, 불상사는 없었으면 합니다.<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4월 16일 방송>
2.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21-22절)”과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5절)”을 읽었습니다. 첫 단락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한 번의 용서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 요즘 첨예하게 대두되고 있는 문제로 한일 양국 간의 해묵은 용서 논쟁을 꺼내보려고 합니다. 날씨 탓인지 매일 최소한의 일과와 식사 시간을 빼놓고 침대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유투브를 통해서 한일 간의 여러 문제들을 주제로 한 토론을 청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해자는 피해자가 용서해 줄 때까지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말 앞에서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앉았습니다. 그러니까 분이 풀릴 때까지는 계속 잘못을 빌고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대부분의 논객들은 자기 식으로 용서를 빌면 그것으로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전혀 용서를 비는 마음과 태도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나라를 강탈하고 말과 이름을 빼앗고, 젊은이들을 전쟁터의 방패 잡이로 만들고 처녀들을 성의 노리개로 만들었던 과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오히려 미개한 사람들을 개명시켰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분이 풀릴 때까지 용서를 빌어야 한다.
성경에서 용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슬리하(סְלִיחָה) 이며, 헬라어로는 압히에미(ἀφίημι)인데, 그 뜻은 “지워버리다. 기억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 다시 기억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용서라고 할 때, 우리 인간들은 용서할 능력이 없는 존재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용서한다고 다짐까지 했으면서, 가장 필요할 때 꺼내서 되풀이 속을 뒤집는 존재들인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일곱 이라는 수를 하나님의 은총과 관련지었습니다. 안식의 수자이며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수자였습니다. 모든 부정과 절망에서 회복되는 수자였습니다(레 14:7). 그런데 주님은 용서하는 일이 한 번도 불가능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을 말씀하십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용서란 불가능하고 또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런 불가능하고 불가능한 용서를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하셨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 실행에 옮기신 것입니다(롬 5:8).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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