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883(2020. 3. 21. 토요일).

시편 72:11-14.

찬송 19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니콜라스 튤러프 박사의 해부학 교실이 미술사에 그은 새로운 획은, 그 그림이 첫 단체화라는 겁니다. 단체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여러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초상화이지요. 물론 그 전에도 여러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단체화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단체화는 한 명의 초상화를 연이어 붙여 놓은 듯, 일렬로 쭉 줄 세워진 것이었지요. 여러 명의 초상이 자유롭게 배치된 진정한 의미의 첫 단체초상화는, 바로 렘브란트의 <해부학 교실>이 처음이었던 겁니다. 그런가하면 이 그림에서 바로 빛과 어둠이 강렬하게 대비되는 렘브란트 특유의 스푸마토 기법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해부학이 교양이고 해부학 장면이 중요한 관람거리라는 거, 좀 잔인한 유행이었을까요? 아니면 사람이 자기 몸을 알고 제대로 들여다보는 건 중요하니, 오히려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유행이라고 볼 수 있었을 까요? 마종기 시인은 미국에서 의사로 일했지만, 우리말로 계속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그가 쓴 시 중에도 <해부학 교실>이라는 시가 있는데요. 그 시에서 해부학은 고운 매듭을 이어주는 숨소리를 음미할 때마다/ 살아 있는 보람이 물결일어 넘쳐나는 개선가를 불러준다/ 여기는 먼먼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생명의 온기를 감사하는/ 서정의 꽃밭으로노래됩니다. 끔찍하고 잔인한 듯해도, 내 목숨을 내가 깊이 알고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도, 분명 생명의 신비에 감탄하고, 삶의 경이로움에 감사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그런 그림과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321일 방송>b.

 

2.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1-13)”을 읽었습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세상에서 허물과 결점이 없는 사람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 없다 불러주시는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살고 있었는지를 예로 들면서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권고하는 사도의 말씀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걸핏하면 우상 숭배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 말하면서도 모세가 보이지 않자 불안한 나머지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긴 것입니다(32:1-6). 권사 장로라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 너무 궁금한 나머지 미아리 처녀 선녀를 찾아간 것과 같은 얘기입니다. 사실 우상 숭배는 무당을 찾는 일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다 더 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우상입니다.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신앙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음행을 저질러서 하루에 23,000명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25:1-10). 음행의 벌은 가혹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뱀에 물려서 죽는 사건도 있었습니다(21:4-9). 하나님께 대놓고 불평하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14:2-19). 이렇듯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은 망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엉망입니다. 마치 세계 의료 선진국이라고 자랑을 해 오던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이번 코로나 19 사태로 그 민낯을 보이는 것처럼, 오늘 우리 기독교회의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초라한 모습인지를 여과 없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거나 믿습니다. 아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는다는 모습, 향기를 풍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를 그토록 강조했던 이유가 밝혀진 것입니다.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처럼 외친 이유도 밝혀진 것입니다. 천막이나 신발을 기우며 목회를 했던 사도 바울을 따라 살려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가난한 교우들처럼 살 수 있다 생각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상숭배, 음행,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 온갖 불평과 원망을 생산하는 일들을 바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실증인 고린도 교회처럼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