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941(2020. 5. 18. 월요일).

시편 80:13-15.

찬송 41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일본 도쿄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설국]을 쓴 곳, 에치코 유자와 마을까지는 신칸센으로 약 1시간 20여 분이 걸립니다. 에치고 유자와 역에서 내리면, 야스나리의 숙소였던 다카한 류칸까지는 약 10분 정도의 거리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지요. 산책로의 주테마는 당연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입니다. 사실 에치고 유자와 마을은 소설 [설국]이 아니었다면, 눈이 엄청 많이 내리는, 그래서 주위에 스키장이 많은 시골 마을로 더 유명했을 겁니다. 일본엔 다른 지역에선 벚꽃이 분분한 4월에도, 그 마을에선 폭설이 쏟아서 산더미처럼 쌓이곤 합니다. 그 풍성한 눈은 녹으면서는 마을에 좋은 물을 공급하지요. 그런 좋은 물은 좋은 쌀을 나게 하고, 그 좋은 쌀은 다시 좋은 술을 나게 합니다. 그래서 에치고 유자와 마을에서 나는 청주와 쌀은 일본 내에서도 질 좋기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후로, 그 모든 것들 보다 가장 크고 널리 에치고 유자와를 알리는 것은 소설 [설국]입니다. 마을 이름부터가 아예 <설국마을>로 불릴 정도입니다. 그곳으로 문학 기행을 떠나는 이들은 아예 소설 설국의 첫 문장, 첫 장면을 보여주는 시미즈 터널을 제일 먼저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예 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라는 주인공의 첫 도착부터를 그대로 똑같이 느껴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에치고 유자와 마을과 접해 있는 이웃 기차역 군마 현의 미나카미 역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기서 기차를 타고 시미즈 터널을 지나야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에치코 유자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51212일 방송>a.

 

2. “희년에 관한 법 2(35-55)”을 읽었습니다. 요즘은 우리 사회에서도 흔치는 않지만 제법 회자되곤 하는 희년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25:8-10에 간략하면서도 충분한 개요가 있는데, 사람이나 사건이나 50년이 되면 본래 있던 대로 되돌려 놓는다는 규정입니다. 사정이 있어 누군가의 종이 되었다면 50년이 되는 해엔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땅을 사거나 했다면 50년이 되면 그 모든 것을 면제해 주거나 되돌려 주도록 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희년이라는 제도는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첫째는 누구도 영원한 소유물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만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인으로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실례(實例)를 자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가난한 동족에게 월세나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한다거나, 종처럼 부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그들 민족이 이집트에서 430년이란 긴 세월동안 종살이 했던 시절 꿈꾸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국인(異邦人)을 종으로 사거나 그 종의 자손들을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는 예외였습니다. 햇수가 얼마든지 그리고 심지어 상속까지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국인에게 종으로 팔려갔을 경우에는 희년(50)을 기준으로 1년에 얼마씩 계산해서 무를 수 있도록 권하고 있는 내용이 신기합니다. 한 마디로 불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종살이 하는 외국인은 무제한적인 소유가 인정되지만, 외국인에게 종살이하는 유대인은 값을 계산해서 무를 수 있다니 말입니다. 바로 이런 규정을 근거로, 유대인들은 외국인 여인이 난산(難産)을 하고 있을 때는 죽든지 말든지 못본 체 해도 무방하지만, 유대인 여인이 난산을 할 때는 누구든 반드시 그녀를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의 초점은 유대인이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불편부당한 생각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돼 내려오고 있다면 오해일까요? 행색이 남루한 수도승이 시주(施主)를 하러 찾아왔다 합시다. 며칠 밥을 먹지 못했다고 사정을 해도 매몰차게 문을 닫아버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교회를 다녀요. 그러니 줄 수 없어요.” 입으로는 사랑을 줄기차게 외치는 사람의 말로 들리십니까? 저의 중학교 동창 중 한 사람은 조계사에서 승려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나를 만나면 항상 박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부처가 되기 바로 아랫 단계 칭호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말씀도 매일 읽는다고 합니다. 속 좁은 기독교인보다는 포교력이 높고, 감동을 주는 힘이 강할 수 밖이라 생각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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