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943(2020. 5. 20. 수요일).

시편 81:1-4.

찬송 7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녀가 말했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독일 뮌헨의 슈바빙에 가고 싶다고 한다면, 십중팔구 전혜린이 아는 문학청년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소녀시절부터 절대 평범해선 안 된다는 명제를 지상과제로 삼았고, 모든 평범한 것, 사소한 것, 게으른 것, 목적 없는 것, 무기력한 것, 비굴한 것을 증오했던 그녀의 삶은,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10대와 20대들의 가슴을 뒤흔들었습니다.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는 오래도록 잔상이 남는 구절이 나오는데요. 이 구절이 1989년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가 이루어진 뒤에 많은 젊은이들을 주저 없이 뮌헨의 슈바빙으로 이끌었습니다. “트렁크를 침대 밑에 넣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안 왔다. 열쇠로 방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갔다. 그 때 마침 가스등을 켜는 시간이어서, 다섯 시 경이었던 것 같다. 제복입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좁은 돌길 양쪽에 서 있는 고풍 그대로의 가스등을 한 등 한 등 막대기를 사용하여 켜 가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안개와 어둑어둑한 모색 속에서, 그 등이 하나씩 하나씩 켜지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짙은 잿빛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내가 유럽을 그리워한다면 안개와 가스등 때문인 것이다.” 195510월 그 때 전혜린은 스물 한 살이었고, 그로부터 10년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토록 스스로에게 잔인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뮌헨에 가지 않았다면 최소한 돌아와서 그곳을 그토록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자유롭게 추구하며 살아가는 독일 여성들의 삶을 이미 봐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이 여성에게 순종과 정숙을 강요하는 근대였지요. 한 번 본 뒤에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풍경이 그렇고 어떤 만남이 그렇습니다. 그것을 보아버린 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전과 똑 같은 생각이나 감정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곳이 이국이 되고, 지금부터 살고 싶은 곳이 모국이 됩니다. 전혜린에게는 스물한 살 뮌헨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 봤던,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318일 방송>

 

2. “야훼를 바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화(14-42)”을 읽었습니다. 요즘 숨어 있다가 불거져 나오는 말 가운데, “마지노선을 넘다.” 라는 말과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지노선이란 프랑스의 국방부장관 앙드레 마지노의 요청에 따라 1927년에 짓기 시작하여 1936년에 알자스부터 로렌에 이르는 국경 방어선을 말하며, 루비콘 강이란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강 아리미눔과 카이세나 사이에서 아드리아 해로 흘러드는 강의 이름입니다. 본래 이 강은 로마제국 당시 파견된 장군 및 군사들이 전쟁/훈련 등으로 파견나간 뒤 돌아오는 길에 루비콘 강을 건너야할 경우, 로마에 충성한다는 서약의 뜻으로 항상 무장을 해제한 다음에야 루비콘 강을 건널 수 있는, 일종의 전통과 법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장을 하고 이 루비콘 강을 건넌다는 것은 곧 로마에 대한 반역을 나타내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통을 먼저 깬 사람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인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에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고는 무장해제 하지 않고, 갈리아원정을 함께했던 군사들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합니다. 물론 당시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은 로마에 대한 반역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율법을 어긴다는 말은, 마지노선을 넘는 일이었고, 루비콘 강을 무장해제 없이 건넌다는 매우 위험하고 도발적인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는 일은 멸망을 자초하는 일임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려 일곱 번이나 기회를 주고 있다는 긍휼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15-17, 18-20, 21-22. 23-26, 27-32, 33-35, 36-42).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할 때, 은혜와 긍휼이라는 두 단어를 사용합니다. 은혜란 넘치고 넘치는 더할 나위없는 사랑을 뜻하고, 긍휼이란 끝까지 기다려주는 인내의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긍휼의 뜻이 불쌍히 여김이라는 것인데, 일곱 번이라는 수는 거룩하고 완전한 수(3+4=7)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벌하신다면, 참고 기다릴 수 있는 데까지 이르셨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이라고 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인내 후에 벌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앞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약점과 허물로 뭉쳐진 뒷모습까지도 사랑하셨으니 변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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