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195호(2021. 1. 27. 수요일).
시편 시 125:4-5.
찬송 37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행복하길 원한다면 그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행복해 지길 원한다면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는 남들이 실제보다 훨씬 더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의 말입니다. 이 말을 인용해서 한 변화 경영가가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개의 세상이 있다. 하나는 나의 연봉이 3,300만원이고, 이웃들의 평균 연봉이 5,000만원인 사회. 그리고 또 하나의 세상은 내 연봉이 3,000만원이고, 내 이웃들의 평균 연봉이 2,700만원인 사회. 그리고 사람들은 이 두 개의 세상 중에서 대부분 나의 연봉이 비록 300만원이 나 줄어들 지언정 이웃들의 연봉보다 300만원이 더 많은 후자의 세상을 선택한다. 따라서 행복은 우리에게 주어진 두 개의 세상에서 어떤 세상을 선택하는가에 의해서 주어질 수도 있고,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괴테의 말을 빌어서 만족한 삶을 사는 법 그 기준을 세워볼까요. 만족한 삶을 위해서는, 일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건강,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부, 어려움과 맞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힘, 몇 가지 행복을 이룰 때까지 노력할 수 있을 정도의 끈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사랑, 그리고 걱정 근심을 없앨 수 있을 정도의 희망만 충족되면 된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월 4일 방송>
2. “세례자 요한의 죽음(14-29절)”을 읽었습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한결같이 떠오르는 생각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그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초라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구세주가 오시는 길의 길잡이로써 인상적인 삶을 살았던 분으로 출발했는데, 그의 마지막 역할은 한 술자리에서 뜻 모를 왁자지껄한 사내들의 웃음 속에, 술에 취한 권력자의 입에 바른 호기(豪氣)가 빚은 비극적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세례자 요한의 생애는 어쩌면 이토록 박복했을까 하는 의문이 늘 떠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자 요한이 헤롯의 기억에 떠오르게 된 얘기가 마치 흑백 영화의 변사(辯士)의 내레이션처럼 흘러나옵니다. 예수의 활동이 유대 전역을 흔들고 있을 때, “예수가 행하는 기적의 힘은 죽은 세례자 요한이 나타난 것이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헤롯왕은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이 그의 마음을 늘 불안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연인이 된 동생 빌립의 처 헤로디아와의 불륜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세례자 요한이 화나게 했고, 그 입을 닫아보려는 심산에서 옥에 가두었던 것인데, 여론도 있고 또 그 자신 그를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듣기는 싫어하면서도 그의 말은 언제나 옳게 여겨져 오히려 기꺼이 들어주어,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는 존재였던 그의 속내를 복음서 기자는 잘 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아첨하는 토호(土豪)들을 위한 연회에서 술김에 내뱉은 한 마디 말이 화근이 되어, 소원 들어주기를 약속하고 애꿎게도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는 역사에 보기 드문 끔찍한 피비릿내 나는 연회장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최후는 로마 식민치하의 유명무실했던 허수아비 왕 헤롯의 술자리에 참수되어 등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허망한 비운의 최후를 맞은 것입니다. 구세주의 길잡이다운 그런 장렬한 최후가 기대되었는데 말입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이 사건을 모두 자신들의 복음서에 대서특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에 관한 기대로 끝나고 있을 뿐, 정작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점없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오래된 속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그에 걸맞는 한 구절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복음서 기자들은 어느 한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나름 깨달은 바가 있어 함께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일생이 이 정도라고 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구세주의 길이나 그 분의 활동을 아무리 엄청나게 조력했다고 한들, 그 모두는 공로는 물론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더 할 수 없는 은총을 찬양할 뿐 인간의 공로나 업적은 티끌만큼도 내세울 수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심판을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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