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194호(2021. 1. 26. 화요일).
시편 시 125:1-3.
찬송 8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 파리에서 찰리 채플린의 영화 <라임 나이트>를 보고 그리 시원치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한 수필가가 있었습니다. 채플린의 영화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아온 그로서는 몹시 실망스런 일이었죠. 그래서 동경에서 다시 <라인 나이트>가 상영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환호하는 사람들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다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라임 나이트>를 한 번 더 보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이번엔 그는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파리에서 본 <라임 나이트>와는 전혀 다른 느낌인데다가 심지어 지금까지 보아온 그 어떤 채플린의 영화와도 바꿀 수 없는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기억 상실증 환자처럼 기억을 더듬어 가다가, 그가 찾아낸 이유 하나는 파리에서 <라임 나이트>를 볼 때는, 몹시 배가 고팠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보다 고픈 배에 더 신경이 쏠려 있었다는 거죠. 또 하나는 불어로 더빙된 영화라서 귀는 막고 눈으로만 보았다는 것. 그러고도 전부를 이해한 것으로 치부 했던 점이었습니다. 이후 그를 괴롭힌 것은 보았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별거 아니다 라고 단정을 내렸던 바로 그 자신의 경솔함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 대상이 사람이었다면, 그 오해는 어떤 모습으로 변형돼 다시 돌아왔겠는가? 생각만 해도 오싹해 진다고 했죠.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지금까지 내가 이해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고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월 3일 방송>
2.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1-13절)”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참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닙니까? 너무 가까이 있는 것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 얘기는 서양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닌가 봅니다. 나다나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적어도 삼십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살았으면서 그렇게도 건성건성 대충 대충 보면서 살아온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니 겉보기로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그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꿈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말입니다. 제게 이종 조카가 둘 있는데 제 고향 마을에서도 아주 깊은 산골짝에서 자랐습니다. 이종형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이종 형수님이 그들을 키웠습니다. 시골에서 어머니의 농사일을 돕는 젊은이로 자랐으리라 생각했는데, 군대를 다녀오고 그 두 조카들은 차례로 행정고시에 합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안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 다들 놀랬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말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드문 일이 아닙니다. 깜짝 놀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생각한 것은 무엇입니까? 목수인 아버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를 뒷바라지 하는 어머니에 대해서 그리고 일가친척에 대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대면하게 되고, 집안이나 동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공유하면서 매우 친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내면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희망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으로부터 유명 인사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대중 연설가로써 그리고 각종 병자들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마술가로써,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인기인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거기다 여기저기에서는 이상한 소문도 덧붙여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언자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랍비라고도 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하는 소문들 말입니다. 저도 1년에 서너 차례 고향을 방문하지만, 대부분의 친척들은 그 옛날 개구쟁이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차라리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의 가족들은 저를 어렵게 대합니다. 어머니가 생전에 저를 특별 취급하셨으니 말입니다. 제게만은 음식도 특별하게 준비하셨고, 말씀도 위엄에 찬 목사님으로 정중하게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족들만은 항상 조심스럽고 예절바르게 대하였을 테니까 말입니다. 겉과는 달리 사람의 속을 쉽게 판단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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