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611호(2022. 3. 19. 토요일).
시편 시 67:1-4.
찬송 45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흔히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워놓고 삽니다. 하지만 성공한다고 해서 행복해질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행복하면 성공할 것이다.”로 발상을 바꿔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통계조사에 의하면 행복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행복을 먼저 선택하는 지혜를 가진 자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셈입니다. 나는 행복의 비결이 영어 단어 <Happiness>에 함축되어 있다고 역설합니다. 행복을 뜻하는 이 단어의 어원은 ‘발생한다.’는 뜻을 지닌 happen입니다. 이는 ‘행복은 발생하는 것이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행복은 쟁취나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발생되고 창조되는 것입니다. 획득은 어려워도 발생은 쉽습니다. 그냥 웃고 그냥 행복한 척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의 감정이 발생합니다. 우리의 뇌에서는 행복한 척해도 실제 행복할 때와 같이 도파민, 엔도르핀 등의 행복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발상으로 곤궁한 처지에서도 행복을 흐트러트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학창 시절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것은 흔히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가 훗날 학자로 유명해지기 전까지 상당히 궁핍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모르는 이가 많을 것입니다. 특히 젊은 시절 아인슈타인은 몹시 가난하여 땅 한 조각과 물만으로 식사를 해결해야 할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 시절 하루는 식사 중에 아인슈타인의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초라한 식탁을 보면 한 친구가 입을 열었습니다. ‘자네, 힘들면 우리에게 말을 하지 그랬나. 어떻게든 도와줬을 텐데 말이야. 고작 빵 한 조각과 물 한 잔이 식사의 전부란 말인가? 자네가 이정도로 어렵게 사는 줄 미처 몰랐네.’ ‘무슨 소리야? 나는 지금 만찬을 즐기는 중이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당당히 말하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에 친구들은 놀랐습니다.”
차동엽, <잊혀진 질문>, pp.80-82.
2.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대로(17-24절)”을 읽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나 목회자 강습회에서 가끔 받게 되던 질문 중에는 운명이란 무엇이며 순응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는 것을 비롯해서, 한국인으로, 가난한 농부의 아들과 딸로 살게 된 것 등이 운명에 해당되는 내용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태어남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얼마든지 꽃피울 수는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그런 수도 없는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발점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더 바람직한 삶을 꿈꿀 수 있고 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운명에 대한 이해와 그 대처하는 방법을 일러 준다는 뜻에서 중요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유대인으로 혹은 이방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경우와, 사회적 신분 곧 자유인과 노예로 부르심을 받은 경우를 말씀하고 있지만, 그 중심점은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차원에 다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이나 혹은 이방인으로 부름 받은 경우입니다. 유대인은 생후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는 규범이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표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할례의 여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더 이상 할례의 유무로 사람을 판가름하는 악습을 폐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통해서 유대인이 되려는 이방인들에게, 그리고 이미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면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둘째는 자유인과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신분에 자만하거나 혹은 좌절할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과, 이미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오랜 전에 교회를 짓는 공사장 노동자들에게 여신도회가 위로회를 열었는데, 제가 기도하면서 “이 주님의 중들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와 기쁨을 주시라.”고 기도했는데, 노동자들이 오해할까 걱정이 된 감독 장로님께서, “우리 교회에서는 목사님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니까 오해하지 마시라.”고 광고까지 했었습니다. 우리들 크리스천은 사회적인 계급을 타파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는 사람들일 뿐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세상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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