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614호(2022. 3. 22. 화요일).
시편 시 68:4-6.
찬송 51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진 사람, 착한 사람, 선한 사람. 이렇게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장자(莊子)의 말을 들으면,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법하다. 장자가 이렇게 말했다. ‘자기 생각과 같으면 옳다 하고, 자기 생각과 다르면 그르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은 선악을 철저하게 자기를 중심으로 결정한다. 나에게 좋으면 선이고, 나에게 나쁘면 악이다. 이는 곧 소인배(小人輩)의 선악관이다. 나에게 좋으면 남에게 악이 될 수도 있고, 나에게 나쁘면 남에게 선이 될 수도 있다. 이는 대장부(大丈夫)의 선악관이다. 소인은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대인은 남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기 중심이 곧 욕심을 솟게 하는 샘이다. 이런 샘물을 마시고 사는 인간은 항상 목말라하면서 게걸스럽다. 욕심이 마음속으로 갈증을 불러내 목마르게 한다. 어질고 착한 사람의 마음은 단비를 맞아 싱싱한 잎새 같기 때문이다. 어진 사람은 패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굳이 자기 생각과 같은 사람을 모을 필요가 없으므로 패를 갈라 싸울 일이 없다. 그래서 어진 사람은 다투지 않는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아는 이에게는 네 탓이다. 내 탓이다. 싸우는 일이 부질없다.”
윤재근, <내 마음속 조용히 살어리랏다>, p.231.
2. “종말을 목전에 둔 미혼 남녀들 2(36-40절)”을 읽었습니다.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욕망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선한 욕망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악한 욕망으로 나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축구를 해설하는 분이 사용하는 말로, “동물적인 감각”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하는 분이나 듣는 우리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짢은 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지 동물이 되면 안 되는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언급한 내용입니다만, 한 성경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한 젊은이가 강사인 담임목사께 질문을 했습니다. 교회 성가대원인 여자 대원이 너무 사랑스럽다면서 성적 충동을 억제할 수 없는데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옳으냐 나쁘냐는 내용이었습니다. 난처한 목사님은 제게 대답 좀 부탁한다는 사인을 보냈고,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러시아의 철학자 베르자예프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생리적인 욕망과 윤리적인 욕망이 있는데, 성적 욕구도 생리적 욕구로 분류할 수 있다며 그것은 동물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는 것은 짐승노릇을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윤리적 욕망을 유지할 한 단계 높은 존재이기에 자신 뿐 아니라 상대방 그리고 사회적 관계 등을 고려해야 옳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짐승이 되고 싶은지, 아니면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결정하라고 되물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무섭도록 빠르게 개방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 결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들만 좋으면 사랑의 표현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하철 안의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을 지켜봐야 합니다.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현상을 사도 바울 역시도 목격했거나 아니면 구체적인 상담 등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욕정을 억제할 수 없거든 약혼을 파기한 사람이라면 결혼을 하고, 자기 절제가 가능하다면 현상을 유지하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결혼하는 것도 잘 하는 일이지만, 결혼하지 않는 것은 더 잘 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만큼 결혼생활의 갈등이 심각했다는 의미입니다. 혹시 사별하고 재혼을 할 경우라면 신자와 할 것이며, 과부는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권합니다. 물론 이런 권고들은 바울의 사견입니다. 다시금 소크라테스를 소환하게 됩니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되는 일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결혼생활은 이런 이기적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감당할 수 밖인 때문일 것입니다. 이른바 잉꼬부부라고 자랑하던 이들이 얼마나 형편없이 추락하는 지는 익히 보아왔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이 함께 살려했으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요? 함께 살아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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