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723호(2022. 7. 9. 토요일).
시편 시 85:7-9.
찬송 41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도라지꽃은 전국의 여름의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입니다. 7월의 뜨거운 볕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그 청초함을 잃지 않은 자태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꽃이지요. 박화목시 윤영하 곡 <도라지> 꽃 준비했습니다. 어딘가 동호(東胡)의 정취가 느껴지는 순박하고 담백한 느낌을 주는 곡이지요. “도라지 꽃, 풀 초롱 꽃 홀로 피었네. 솔바람도 잠자는 산골짜기, 예부터 돌돌 흘러온 흰물 한 줄기. 한 밤중엔 초록별 내려 몸 씻는 소리.”
1956년에 작곡된 곡입니다. 6.25의 소용돌이 속에서 숨 가쁜 삶을 영위해야 했던 시대상이지만, 작곡가는 평화롭고 서정적인 분위기에서 작곡한 곡이라고 말을 합니다. 서정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박화목의 시는 도라지꽃에서 풍기는 향토적이고도 소박하며 정갈하기 이를 데 없는 정서를 담아내고 있지요. 선율은 도라지꽃이 외로이 피어 있는 산골짜기를 떠올릴 수 잇을 것 같이, 고즈넉한 느낌을 줍니다. 전주(prelude)나 선율, 반주할 것 없이 모두 소박한 느낌을 자아내는 사랑스럽고 담백한 노래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7월 6일 방송>
2. “마지막 권고와 인사(11-18절)”을 읽었습니다. 1세기 헬라 문화권에서는 일정한 패턴의 편지 형식이 확립되었는데, 이는 바울 서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가령 바울 서신을 분석하면 서두에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는 것과 간단한 감사와 축복의 인사말이 있었고, 본론으로는 교리적인 내용과 윤리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으며, 말미에서는 문안 인사와 권면 그리고 축복의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역시 이런 패턴을 따르고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인사와 권면은 조금 더 길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도가 본문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요약하기라도 하듯 말입니다. 그 주제는 유대적 율법주의를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할례를 강요하는 교회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할례는 창 17장에서 잘 소개되고 있는데, 생후 8일째가 되는 유대 사내아이가 하나님과 맺는 피의 언약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섬길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고백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의식입니다. 물론 생후 8일된 아이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부모가 그를 대신해서 하게 되며, 그 후부터 그 아이는 쉐마교육을 받으며(신 6:4-9) 이를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할례의 강요는 초대교회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요인도 작용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회를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받음으로 그런 박해를 완화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시간이 흘러가면서 유대인들이 강조하는 율법적인 사람들로 바뀌어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나 인간사이의 관계를 율법의 정신을 따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의 신앙생활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슬픈 현상이기도 합니다. 주일 성수나 십일조 헌금 등이 문제가 되는 원인이 되고 만 현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할례의 정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보다는 할례의 표시만 지니기만 하면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자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에 대한 강조가 지나치다 보니까 율법주의로 흐르게 되었고, 가장 잘 가르쳐야 하고 실천해야 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강조가 실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할례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힘써야 할 율법 준수 역시 명목상의 겉치레에 불과하면서 말입니다. 초대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세 종류로 말하곤 합니다. 첫째는 유대인 크리스천인데, 주로 예루살렘 기독교회 성도들입니다. 대표 격인 야고보를 비롯한 열두 사도가 포함된 공동체입니다. 둘째는 이방인 크리스천입니다. 대체로 사도 바울과 바나바 등의 선교에 의해서 소 아시아나 유럽 등에서 예수를 믿게 된 성도들입니다. 셋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크리스천들입니다. 이들은 해외에 살면서 고국과 왕래가 있거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사람들로 대표적인 사람들이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선교를 받은 일이 없었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이미 로마 교회의 성도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크리스천들을 상정(想定)할 때,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과는 다른 여러 가지 사상과 전통 그리고 타종교 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유대교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율법주의는 가장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율법주의의 한 내용인 도덕주의가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인양 가르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중심적인 선행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선행이란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없는 때문입니다. 이로써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복음, 곧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확실하게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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