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728(2022. 7. 14. 목요일).

시편 시 86:11-13.

찬송 20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면, 보이는 건 모두가 그 전과는 다르게 보입니다. 저 하늘이 저렇게 푸르고 맑았던가? 새삼 올려다보게 되고, 가로수 나무 한 그루 길가에 나지막 꽃 한 송이가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지요. 홍기만 시 장일남 곡 <사랑하는 마음>은 사랑을 담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서산에 지는 석양빛조차 그대를 그리는 내 마음으로 보이겠지요. 석양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잔잔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서산에는 석양 빛 아름다워라. 붉게 불게 타오르는 저 노을은 그대를 내 마음 같다. 서산에는 석양 빛 아름다워라.”

   간결한 시에 담백하고 소박한 멜로디의 곡입니다. 은은하고 깊은 음의 세계에 푹 빠져들게 하고 싶게 하는 멜로디지요. 붉게 타오르는 석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빠져들게 합니다. 아마도 그러한 것이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정서를 유발시키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 이 곡도 아름답지만 어딘가 애잔한 느낌을 줍니다. 70년대 후반에 작곡이 됐고, 작곡가 장일남 선생은 사랑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 사랑을 이룰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담긴 시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조금은 애잔한 멜로디로 그 마음을 표현했다고 합니다<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710일 방송>

 

2.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2(12-16)”율법과 유대인(17-24)”을 읽었습니다. 도덕률을 가진 종교를 고등종교라고 부르는데, 인간의 삶에 건강한 의미와 목적을 찾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도덕률을 갖지 않은 종교를 하등종교라고 부르는데, 개인의 인격을 파괴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미신이나 사이비 종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적어도 도덕률을 기초에 두고 있는 종교라고하면 일단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추세입니다. 가령 기독교인들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지만, 불교나 유교 기타 타 종교들 역시 고등종교라고 불리는 한, 기를 써서 배척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도덕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율법이란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는 도덕률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율법이나 도덕률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의미하는 규정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율법이란 일반인들이 말하는 단순한 도덕률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된 도덕률을 말하고 있는 점이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가령, “부모를 공경하라.”는 의미는 동일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친다는 점입니다. 분명한 것은 율법이든 도덕률이든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실행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도덕률이든 율법이든 그 중심인물은 인간이라는 점과, 또한 그 최후의 수혜자 또한 인간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은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이나 도덕률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1차적으로 율법을 가지고 인간을 심판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그들이 가진 율법에 의해서 정죄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아무리 도덕군자라고 해도, 심지어 효자상을 받은 사람까지도, 부모에게 불효한 죄인이라는 것이 실제 현실입니다. 아무리 금욕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역시 간음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음욕을 품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아무리 무흠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역시 살인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누구나 힘든 삶의 길목에서 살의(殺意)를 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인간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율법이나 도덕률에 의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그것입니다(14:2-3). 그러니 모든 인간 앞에는 하나님의 심판밖에는 다른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자들에게서 나온 현상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 구원받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오해 말입니다. 이런 율법주의는 바벨론 포로 이후의 현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써 자신들이 남다른 고난의 삶을 살고 있는 이유에 대한 답으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각오와 결심이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조금만 지각이 있다면, 율법은 지킬 수 없는 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율법을 강조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 중심의 율법적인 신앙생활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가진 죄를 더욱 더 분명하게 고발할 뿐이라고 말입니다.

 

3. 어제 인용한 영어성경은 NIVKJV으로, He became to himselfHe came to himself로 정정합니다. 여행 중이라 기억에 의존했던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동일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