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05(2022. 9. 29. 목요일).

시편 시 102:12-14.

찬송 32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지고 아름다워지는 사랑을 그리고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김종철 시 김동진 곡 <만남>. 서정적인 멜로디 안에 만남이 주는 따사로움이 감돌고 있는 이 곡은, 노년기에 접어든 노부부가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서로에게 주고받았던 감정을 일깨우고 있는 것처럼, 잔잔한 아름다움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내 마음 작은 실개울로, 그대 사랑이여 걸어오오. 그대 자문거리는 물무늬에 잔잔히 내 몸 무너지고, 스러지는 슬픔보다 더 크게 자라나는 기쁨. 그대 알지 못하리, 이것이 사랑인 것을. 내 마음 여린 호수가로, 그대 사랑이여 다가오오. 그대 주저앉힌 잔 물살에 서서히 내 몸은 사라지고, 터져 오는 아픔보다 새롭게 살아나는 눈부신 황홀. 그대 알지 못하리, 이것이 다짐인 것을. 그대 알지 못하리, 이것이 사랑인 것을. 내 마음 푸른 바다로 그대 사랑이여, 건너오오. 그대 바람 부는 흰 파도에 맞서 노 저어 나아가리. 수평선 너머 보금자리, 그대와 나를 기다리네. 그대 알아야 하리, 이것이 사랑인 것을. 그대를 만난 내 사랑, 푸르게 노래함만이 나의 생명인 것을. 그대를 만난 내 사랑, 생명의 노래를 불러다오, 사랑하는 그대여.”

   젊은 날의 만남이 시간이 흐를수록 시간과 함께 성숙해 지고, 이젠 잔잔한 미소와 여유로 바라 볼 수 있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황혼기에 접어든 노년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이 만남의 이야기 속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7천만 한 민족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하는데요. 200093, 유엔은 21세기 마지막 분단국인 남북한의 비극을 되새기기 위해서, <한국의 날>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는 음악회를 개최해서 남북한 성악가가 함께 부를 예정으로 만들어진 곡이 이 만남입니다. 하지만 이 당시 정치적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음악회가 개최되지 못했고요. 어찌됐건 이러한배경속에서 이 만남은 탄생한 곡이지요. 높은 벽을 허물고 남과 북의 민족이 하나가 되자는 깊은 속내가 담긴 아름답고도 힘찬 곡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노래를 접해 본다면, 보다 새로운 느낌을 받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929일 방송>

 

2. “욥의 답변 : 불의한 인간과 의로운 하나님(16-22)”을 읽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엘리바스의 충고(15:1-35)”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러니 엘리바스의 충고를 알아야 욥의 답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우리는 실패한 사람의 말에는 귀가 닫히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성공한 사람의 말에는 귀가 활짝 열리다 못해 온 몸의 오감이 다 빨아들일 태세입니다. 그 결과 실패자의 말은 온통 변명과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성공자의 말은 한 마디 말도 놓쳐서는 안 될 인생 비결처럼 감싸 안아주곤 합니다. 어느 기독교 일간지에 <역경의 열매>라는 칼럼이 있는데, 제가 잘 아는 장로님 한 분이 그 칼럼의 주인공이 되었던 경험을 술회한 일이 있습니다. 처음 몇 번은 비교적 자신의 이야기가 실렸는데, 나중에 딱히 시사성이 있는 일화도 없고 재미가 반감되어가자 그 코너의 담당자는 아예 소설가가 되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한 두마디 얘기만 하면 그것으로 침소봉대는 물론 창조성을 발휘해서 소설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역경의 열매>는 거짓 이야기들로 가득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독자들이 원하는 글을 써야 그 칼럼이 유지되었을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충고를 들으면서,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듣는가, 아니면 미움의 마음으로 듣는가로 달라진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무슨 말이든 이해하려는 쪽으로 방향을 돌릴 것이지만, 미워하는 마음이라면 무슨 말이든 온갖 억측까지도 끌어들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거기엔 팩트가 자리를 잡을 빈 공간이 없다는 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욥은 자신을 만신창이가 되도록 만드시고, 악당들에게 넘기신 하나님이시니 할 말이 없다 결론짓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음을 밝힙니다. 그것은 나의 증인은 하늘에 있다. 나의 보증인은 저 높은 데 있다.”고 말입니다. 욥이 붙들고 있었던 최후의 희망은 주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실패자의 온갖 변명과 원망까지도 조용히 그리고 진지하게 들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최근 우리 기독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몰매를 맞는 것과, 날마다 쇠약해 가는 것을 비관적으로 얘기하는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아직도 우리 신앙인들이 제정신을 차리려면 더 시련과 함께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시편 121:1-2의 시인의 심정을 가져야 하는 때문입니다. 하나님 밖에 바라볼 것이 없는 바로 그때만이 참된 신앙이 싹트는 때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정반대에 눈길을 주고 있으니 시기상조일까요?

 

3. 묵상식구 전의찬교수께서 기후문제에 관한 기고문 4편을 보내주셔서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들도 에너지 절약과 대중교통 이용, 버스 2-3구간 걷기 등으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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