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18호(2022. 10. 12. 수요일).
시편 시 104:6-8.
찬송 20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생활하면서 한 번도 슬럼프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나 대부분 한번쯤 이 슬럼프에 빠져서 무력감이나 좌절감, 허탈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때는 실력을 크게 발휘하다가 슬럼프에 빠지게 되면, 더 견디기 어려워지기도 하지요. 주위 사람들의 기대가 무척 크기 때문입니다. 무력감에 빠져서 드는 생각 중에 자신을 제일 괴롭히는 것이, 나 자신이 이렇게 무력하고 형편없는 사람이었던가? 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러시아의 작가 고리끼도 “재능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고, 자기 힘을 믿는 것이다.” 이런 말을 남겼는데요.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것은 재능마저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겠지요. 능률이 오르지 않고, 매사에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는 것 같고, 그래서 더욱 더 괴로운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스스로 자신감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자꾸만 잊어버리곤 하지요. 옆에서 어떻게 끌어주고 도와주는 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먼저 자신의 의지로 일어서려고 하는 노력만큼 슬럼프를 이기는 좋은 방법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10월 12일 방송>
2. “욥의 마지막 답변(1-17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욥의 생애는 해피 엔딩이었다고 그만하면 잘 된 인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일천하고 부질없는 생각과 주장을 하며 살았는지를 깨닫고 회개하였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기까지는 무지한 자였음을 통렬히 깨닫고 잿더미에 앉았다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욥의 친구 셋에게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터지는 분노를 말씀하시며 그들의 솔직하지 못함을 일깨워주시고, 욥에게로 가서 자신들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명하십니다. 그러면 욥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용서의 기도이거나 화해의 기도를 올릴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고, 욥의 기도도 받으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욥의 소유를 회복시켜주셨다 말씀합니다. 그런데 전보다 두 배로 베푸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욥을 비난하고 조롱하던 동생과 누이들 그리고 친척들이 동정과 위로를 해 주며 금가락지를 끼워 주었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욥에게 일곱 아들과 세 딸을 주셨는데, 세 딸의 이름을 밝혔는데, 예미마 케지야 케렌하뿌가 그 이름이었습니다. 남아 선호사상이 강한 유대나라에서 아들들의 이름은 감추고 딸들의 이름을 밝힌 것을 두고 말이 많았을 듯싶습니다. 욥은 무려 140세란 생애를 살았는데, 이는 아브라함보다는(175세) 적고, 모세보다는(120세) 많은 세월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욥의 일생은 고단하고 힘든 삶이었습니다.
욥의 이름이 욥기 이외에는 구약 에스겔에 두 번(14:14, 20), 신약 야고보서에 한번(5:11) 언급되고 있는데, 에스겔에서는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욥의 이름이 거명되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의로 자기 생명만 건진다는 내용이고, 야고보서는 욥의 인내를 본보기로 내세운 내용이었습니다. 욥은 우리 인간을 대표해서 윤리적인 삶이 매우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 삶이 얼마나 지난(至難)한 삶인가를 강조하고 있음을 철저하게 느끼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훗날 단테의 <신곡>이나, 밀턴의 <실낙원>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구약학자 엄현섭 교수는 그의 책 <구약성경의 길라잡이>에서 욥기가 주는 메시지를 6가지로 정리하였는데,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이 직면한 불행이나 원인 모를 고난에 대한 대답은 인과응보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과, 인간 흑역사(黑歷史)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서 모든 문제와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만 욥을 통해서 의로운 고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아쉬운 대목이라 밝히고 있는데, 이는 모든 루터신학자의 몫임을 반증하는 것으로, 루터는 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읽고 풀어야 할 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욥의 의인됨은 상대적인 평가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고난의 문제에 욥을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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