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44.

시편 시 106:9-11.

찬송 22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곡은 그 나라의 민족 정서와 예술성이 어우러진 성악곡을 말하지요. 비록 음악적인 특징에 있어서 대부분 서양 음악의 구조와 원리를 따랐지만, 각 국의 모국어로 된 시를 노랫말을 한다는 점은 가곡 속에서 각 나라의 특유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특징이 됐습니다. 특히 우리 가곡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하나의 음악 장르이기에 앞서, 힘든 시기에 위로와 위안이 된 존재로 자리를 잡았지요. 이흥렬이 곡을 쓰고 작곡한 <바위고개> 역시 그러한 작품 중 한 곡입니다.

    “바위 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 납니다. 바위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 님이 즐겨 즐겨 꺾어 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 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바위고개는 일제 강점기에 어쩔 수없는 민족의 비운을 담은 곡입니다. 발표당시 여늬 유행가 못지않게 널리 애창되며, 많은 분들의 인기를 얻었지요.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이흥렬 선생은 독일 유학을 꿈 꿨습니다만, 홀로 계신 어머니를 생각해 독일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해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바위고개> <고향 생각>, <어머니 마음>, <코스모스를 노래함>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이지요. 작곡 된지 20년만인 한국 전쟁당시, 부산에서 김혜란이 다시 불러, 다시 한 번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던 곡이기도 하지요. 얼마 전 서울시 소년소녀 합창단의 정기 연주에서 이흥렬 선생의 <바위고개>를 작곡가로 활동 중이지요. 두 아들, 이 영조 한국 종합예술학교 교수, 그리고 이 영수 영남대 작곡가 교수, 여기에 손녀입니다. 피아니스트 이현주가 함께 한 자리에서 연주를 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고 이흥렬 선생은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만, 3대가 음악으로 함께 했다는 소식, 참으로 반갑고 감동적인 그러한 소식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116일 방송>

 

2. “청해야 할 손님(12-24)”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나치게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을 보이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에 충실하지 않고 지나친 미래지향적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후 세계에 대한 집착은 걸림돌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첫 단락은 동문서답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식탁 초대는 먹고 배부르기 위함보다는, 즐거운 친교에 목적이 있다고 볼 때, 친지나 가까운 이웃들이 그 대상이 되기 십상인데도, 엉뚱하게도 일면식도 없는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낯선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은 자칫 구제활동으로 자기만족 정도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단락에서 왜 그래야 하는지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둘째 단락에서는 또 다른 식사 초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미 초대받은 사람들이 초대에 응하고서도 정작 초대받은 당일에는 한결같이 초대에 거부의사를 밝힌 점입니다. 그래서 화가 난 초대자는 종들을 보내 길거리나 시장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 등을 데리고 와서 잔치자리를 채우게 합니다. 그러면서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에게는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겠다 선언합니다. 이런 경우 역시 드물긴 하지만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초대에 응했던 사람들이 거절하는 무례를 했느냐고 말입니다.

   앞서 식탁 초대는 즐거움을 위한 친교를 목적으로 한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가족이나 서로 왕래가 많은 이웃들이 될 수 밖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친교의 식탁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 특히 삶에 지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둘째 단락에서 그 의문이 밝혀진 것입니다. 첫째는 소위 제구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초대할 경우 전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이와 같은 친교는 끼리끼리 주고받는 본전(本錢) 장사에 불과한 것으로, 현실 세상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며 길들어진 삶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통하지 않는 때문일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교제는 온전히 낯선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려야 할 곳이라는 말입니다. 천국에서는 세상에서처럼 민족 끼리나 가족끼리 친구끼리 뭉치는 편 따먹기는 기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이해득실이라는 계산을 앞세우는 사람들에게서는, 언제라도 이해득실을 앞에서 친교란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식탁 초대에 응했던 몇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었는데, 밭을 산 사람, 일소() 다섯 쌍을 산 사람, 그리고 막 장가를 든 사람이 그들인데, 그들은 이미 초대를 받았고 응했으면서도, 그 후에 밭을 사게 되었고 일소를 샀으며 결혼식을 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해득실을 따졌을 때 훨씬 더 이득이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면 언제든지 식탁 초대쯤이야 파기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이해득실을 초월한 삶을 살아가는 제3의 종족이었다는 뜻이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1종족 로마인(정상인), 2종족 유대인(조금 이상한 사람).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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