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080호(2023. 7. 1. 토요일).
시편 시 149:1-3.
찬송 46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소월, 한용운, 김영랑은 한 권의 시집으로 한국 현대시 역사를 바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그리고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 아로새겨진 그 한권의 시집이 유일한 작품집이자 유고 시집이었던 분도 있습니다. 이 상과 윤동주 그리고 이육사의 경우가 그랬지요. 그리 길지 않은 비운의 생을 살았던 것이나, 다작(多作)을 하지 않았다는 점, 이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7월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바로 이육사겠지요? 그의 시 <청포도>와 더불어서 말입니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대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며 두 손이 함빡 적셔도 좋으련만, 아이야, 우리 식탁에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마치 구구단을 외우듯이 친구들과 함께 입을 맞춰 시를 외우던 학창시절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육사의 이름에는 많은 수식어가 따르지요? 그는 지사(志士)이자 독립투사였고, 혁명가면서 또한 시인이었습니다. 의혈단 단원이었던 그는 1928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계획이 사전에 발각돼서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3년 동안의 옥고를 이육사는 오히려 자랑스러웠다고 하지요. 당시 자신의 수인(囚人) 번호를 따서 아호를 육사(陸史)로 지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시인의 올곧은 성품이 시를 통해서 전해오는 것 같습니다. 이육사 시, 이종록 곡 <청포도>를 감상하셨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7월 1일 방송>
2. “마지막 경고와 인사(1-13절)”을 읽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다니던 고향교회에서는 교회법으로 벌을 내리는 소위 <책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피웠다던 지, 술을 마신 것이 알려지면 당회가 열렸고, 어김없이 책벌이 내려졌는데, 수찬금지(당시는 1년에 4번 정도 성찬이 있었기에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음), 또는 3개월 출석금지도 있었는데, 제 기억으로는 저의 형님 친구 분이 가끔 책벌을 받곤 했는데, 담배를 끊지 못해서 자주 당해야 했습니다. 이렇듯 교회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교인들의 신앙과 일상생활까지 깊이 간섭하고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이 초기 한국 기독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뭔가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런 엄격한 책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후 두 번째 다시 방문했을 때, 교인들의 신앙생활이 눈에 분명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당시의 고린도 교회를 비롯해서 요즘 그리스의 옛 지명이었던 아가야와 마케도니아 지방은 철학의 고장답게 도덕과 윤리라는 사회적 잣대가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철학에서 흔히 주장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 기독교 신앙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문제는 영은 선하고 순결한데 반해 육은 악하고 추하다는 이원론적 인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의 부활을 부정하였습니다. 사도는 이런 거짓 가르침에 화를 냈고 그런 사람들을 징계하였는데, 들리는 소문대로라면 세 번째 방문 때는 징계가 불가피하겠다. 다짐합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윤리적으로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누구나 이런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때문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 “내로 남불”이 바로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말에 흠이 없는 사람 없고, 재물에 욕심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가족 간의 내밀한 문제들을 밖으로 꺼내는 순간 허물을 넘어 추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 있다면 이런 문제를 꺼내려 하지 않습니다만, 그런데 유독 정치가들은 바보 멍청이들인지 그걸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미국 교포들의 유튜브에는 자주 교회 얘기가 등장하는데, 한심한 목회자들의 얘기도 가끔씩 비칩니다. 하늘 향해 침 뱉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사정없이 문제를 던집니다. 가장 큰 문제는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도덕군자라고 하더라도 낙제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낙제상이 아님을 보이려고 힘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옳은 일에 힘쓰라 권고합니다. 그 기준은 인격의 완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9절). 크리스천으로써 인격의 완성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덕적인 무흠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율법적인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3. 오늘은 3대가 뭉쳐서 두물머리 나들이를 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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