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082(2023. 7. 3. 월요일).

시편 시 149:4-6.

찬송 22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가운데, 시인 박화목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자라면서 한번쯤은 분명 그의 시에 곡을 붙인 동요나 가곡들을 듣거나 부른 경험이 있기 때문인데요. 박화목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거나 혹은 지금까지 잘 들어본 적이 없을 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시인 박화목의 존재는 모교의 낡은 벤치와도 같지 않을까요? 크게 눈에 띄지도 않고 특별할 것도 없지만,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유년시절의 한 부분 같은 것 말입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런 기억의 편린(片鱗) 같은 것 말이지요.

    “산동네 닫혀있던 날 찾는, 그 누가 그 누가, 가만히 열고 조용히 들어와 속삭이는 부드러운 소리, 소리가 있네. 그리운 꿈, 그리운 꿈 불러일으킨, 그건 그건 무슨 소리, 무슨 소리일까? 깊은 산골짝 어느 한적한 곳, 이름 모를 꽃, 꽃망울이 여무는 소리, 여무는 그 소리일까? 그건 그건 무슨 소리일까? 동구 밖 둔덕 미루나무, 나무껍질 뚫고서 새 움트는 생명의 소리. 그 소리일까? 생명의 소리, 그 소리일까? 불현듯 들려온 그 소리 정녕, 내 가슴이 울렁이네. 내 가슴이 울렁이네. 울렁이네.”

    마치 오페라의 한 부분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극적인 곡의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박화목의 고향은 황해도였습니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고향 황해도의 모습은, 그의 대표적인 <보리밭>, <과수원 길>, <도라지 꽃>과 같은 작품을 통해 그려볼 수가 있지요. 박화목은 유년기부터 무척 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또래와 어울려 놀기보다는 책을 읽거나 공상하는 것을 좋아해서, 늘 혼자 있는 아이였다고 하는데요. 그의 문학적인 재능은 그런 유년기 덕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시인의 성품은, 시를 통해서 들어나기도 했지요. 동시대의 작품들을 종교적이고 사색적이면서도 허무가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 시 <소리>처럼 말이지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72일 방송>

 

2.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9-19)”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제사장들과 율법학자 그리고 장로들이 찾아와서 주님께 질문을 했는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 권한이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는 것이었는데, 그에 대해서 나도 모르겠다.”고 하신 후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를 들어보고 대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유목민으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로는 농경문화에 길들었습니다. 그런 농경문화의 하나로 땅이나 사업을 대신 관리해 주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포도원을 잘 조성한 한 부자가 오랫동안 집을 비울 처지가 되어서 그 포도원을 어떤 소작인에게 맡겼는데, 추수 때가 되어서 약속한 도조(지방에 따라서는 도지라고도 하는데, 빌린 땅이나 과수원에 얻은 이익을 나누는 일)를 받고자 종을 보냈는데, 첫 번 째는 빈손으로 돌려보냈고(10), 두 번째 그 주인의 종일 때리고 모욕을 주어 빈손으로 돌려보냈으며(11), 세 번째는 그 종을 때려 상처를 입혀 보냈기에(12), 마침내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보냈는데, 그 소작인이 주인의 뒤를 이을 상속자로 알고 그를 죽여 포도원을 독차지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13-15). 그러자 주인은 돌아와서 그 악한 소작인을 죽여 버리고 다른 소작인으로 교체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씀하시자,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은 어디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을 합니다. 말뜻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그런 악한 소작인이 어디에 있겠느냐? 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의 뜻을 알아야 한다면서,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누구나 산산조각이 나고, 깔리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계약 위반에 관한 이야기는 세상에 널리 깔린 흔한 얘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본문에 등장하는 소작인처럼 당돌하고 끔찍한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보인 반응처럼, 어쩌다가 나타난 보기 드문 돌연변이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버림받았던 돌덩이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는데, 그 돌 위에 떨어지거나 깔리게 되는 사람은 산산조각이 나거나 가루가 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듣고 있던 지도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으려 했지만, 그 버림받은 돌덩이가 가장 중요고 명예로운 모퉁잇돌 곧 기초석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들이 비웃음을 받으며 목이 잘려 주었던 세례 요한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돌 위에 떨어진다거나 깔린다는 말은 심판의 내용이 이렇듯 구체적이라는 것과 그 결과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산산조각이 나고 가루로 부서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버려진 돌덩이를 모퉁이 돌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항아리도 그 돌덩이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가루로 바뀌어 버리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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