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282(2024. 1. 19. 금요일).

시편 시 40:7-9.

찬송 5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116일은 시인 이 육사의 기일(忌日)이었습니다.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그는 임종의 순간에도 가족들의 곁이 아닌 바람이 매서운 북경의 감옥 안에 있어야 했지요. 자신의 호인 육사(64)를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당시의 수인번호를 따서 지을 만큼, 육사의 의기(義氣)는 강건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가족들의 곁에서 눈감지는 못했지만, 시인은 눈 감는 날 까지도, 생의 단 한 순간 후회는 없다 말을 했지요. 그의 올곧은 마음처럼 이 육사의 시에는 기개가 담겨 있었습니다.

    “섣달에도 보름께 달 밝은 밤/ 앞 냇강 쨍쨍 얼어 조이던 밤에/ 내가 부르던 노래는 강 건너 갔소/ 강 건너 하늘 끝에 사막도 닿은 곳/ 내 노래는 제비같이 날려서 갔소/ 못 잊을 계집애나 집조차 없다가/ 가기는 갔지만 어린 날개 지치면/ 그 만 어는 물에 뿔에 떨어져 타 죽겠소/ 사막은 끝없이 푸른 하늘이 덮이어/ 눈물 먹은 별들이 조상 오는 밤/ 밤은 옛 일을 무지개 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가락 여기 두고 또 한가락 어디멘가/ 내가 부르는 노래는 그 밤에 강 건너 갔소.”

    이 육사의 여러 시 가운데 <호수> 같은 작품은, 부드러우면서도 여린 심경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육사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비교적 분명한 어조로 강한 의지를 담아내고 있지요. 방금 들으신 이 시 <강 건너 간 노래>에서도 시인은 강하고 분명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로 시작하는, 마지막 연에서는 왠지 짙은 허무와 서글픔도 느껴지지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편안한 보금자리에 머물 수 없는 시인의 비탄이 시를 통해 전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이 육사 시 나 운영 곡 <강 건너간 노래> 소개해 드렸습니다<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119일 방송>

 

2.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 2(16-26)”을 읽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첫 대화를 영원한 목마름이라는 신앙적인 주제였다고 한다면, 두 번째 대화의 주제는 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내용을 실마리로 삼는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고, 그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다섯 남편이 있었다는 것과, 지금 동거중인 남자는 남편이 아니라고 확인 사살을 합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항복하듯 당신은 예언자라고 시인합니다. 오늘 김정준의 <구약성서의 이해>라는 책에서 그동안 예언자들을 앞일을 미리 말하는 豫言者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말씀을 맡은 자라는 의미의 預言者가 맞다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등 예언자 혹은 선지자의 역할도 하였으나,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소명을 가진 預言者들이었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앞일을 말할 능력도,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말씀을 전하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질문한 예배할 장소에 대한 물음은, 모세의 명령을 상기하면서 축복을 선포한 산 그리심 산과 저주를 선포한 에발 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27:4-26).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주 오래 전에 평화의 땅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왕상 7:13-51). 문제는 남왕국의 예루살렘 성전과 북왕국의 그리심 산과 단에 세운 성전에 대해서 상반된 주장이 열띠어서, 사마리아 여인이 이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 그 자리가 예루살렘인가 아니면 그리심 산인가를 판가름 내고 싶은 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배의 시간이나 그 길이 그리고 예배의 복장 등도 전혀 중요한 논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까닭은 예수님은 이런 모든 논란들을 일시에 잠재우게 할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내 말을 믿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배에 관해서 하실 말씀들은 믿음으로 접근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란 어떤 경험을 가지고 하느냐도 아니고, 예배의 내용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도 아니라, 믿음으로 다가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어냐 하느냐? 그리심 산의 성전이어야 하느냐는 어떤 장소에 진정성이 있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예배의 의미나 목적 같은 본질이 아니라, 예배의 형식이나 변죽에 불과한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예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예배란 진실하게 드려야 할 것인데, 그것은 영적으로 그리고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바로 주님을 중심에 모시는 지금이라고 말입니다. 까닭은 영적이신 하나님은 영적인 예배 그리고 참된 예배를 받으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으로 소리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미친 사람들처럼 노래와 춤을 추면서 예배할 것이 아니라, 영적(성령의 도움으로 주님과 함께)으로 그리고 참(진실)되게 예배하라고 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배의 본질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어제는 연천행 전동차에서 7시간의 힘든 독서여행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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