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285(2024. 1. 22. 월요일).

시편 시 40:13-15.

찬송 33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같은 글이라 하더라도, 문자로 읽는 것과 음악으로 듣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낭독과 노래 역시도 사람의 목소리를 같은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마음에 와 닿는 깊이는 두 가지가 다르지요. 일제 강점기 수많은 지식인들은 국민들에게 나라의 현실을 알리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그 어떤 글보다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 주었던 건 노래였지요. 누군가 내 마음을 알고 쓴 것 같은 글을, 음악으로 고스란히 옮겨낸 작품, 바로 우리 가곡이었습니다.

    “울밑에서 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 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상키를 바라노라

    1920년 홍 난파는 일본음악 학교로의 복학을 제지당합니다. 그렇지만 기운을 잃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글을 쓰는 일에도 재능을 보였던 난파는, 고국으로 돌아와 여섯 개의 단편이 수록된 첫 창작집 <처녀혼>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책의 앞머리에 바이올린 연주곡인 <애수>를 수록하지요. 홍 난파의 지우였던 김 영준은 그 곡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노랫말을 붙였고, 곡의 제목도 노랫말에 어울리는 <봉숭아>로 바꾸었지요. 애조 띤 곡의 분위기와 비감어린 노랫말에서 당시 사람들이 참아내야만 했을 깊은 슬픔과 한숨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김 영준 시 홍난파 곡 <봉숭아>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121일 방송>

 

2.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43-54)”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인의 심각한 질병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일까를 생각해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요즘 제 주변에서 의외로 코로나 확진을 받고 투병한 분들의 소식을 듣게 되면서 많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 분들은 대부분 20여일을 심한 통증으로 고생을 했다하면서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랑하는 아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중병을 앓고 있는 한 벼슬아치가 주님을 찾아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아비에게 조금은 섭섭할 수도 있고, 냉정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다.”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벼슬아치는 아들이 죽기 전에 자기랑 같이 가주시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의 아들이 살 것이라 말씀하셨고, 나중에 살아난 아들이 기운을 차리고 일어난 때를 알아보니, 주님께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때였다는 내용입니다. 이 일화는 2천 년 전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일어났던 사건인데, 오늘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 크리스천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주님말씀처럼 믿는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시대와 환경이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들 인간에게는 누구도 예외 없이 여전히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들을 껴안고 살아갑니다. 본문에서처럼 질병의 문제는 날이 갈수록 병명이 달라질 뿐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경제적인 문제며 정치 사회적인 문제 그리고 국가 간의 갈등으로 전쟁은 도무지 멈출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주님이 하신 말씀, 믿음 없음이란 말은 무엇을 두고 하신 말씀일까요? 과학이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으며, 배고픔의 문제나 질병의 문제도 발전을 이루고 사람의 수명도 엄청난 수치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과제는 태산 같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발전과 개선이라는 것은 큰 틀에서 보면 다람쥐 채바퀴 도는 것과 같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중심적인 과제는 놔둔 체 겉모습만 매만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그것은 인간들 속에서의 문제 해결이 아니라, 인간과 그의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변죽만 울리는 것으로 소리는 요란할 뿐,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늘 공허와 갈증만이 웅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믿음의 문제로 보셨던 것입니다. 1020년 수명을 늘리는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들 세계에서 풀 수 없는 것으로, 자신의 창조주에게 지혜를 배우고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런 믿음의 세계를 향해 눈을 돌리라고 하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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