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286(2024. 1. 23. 화요일).

시편 시 40:16-17.

찬송 41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이였을 때는, 동요를 듣거나 부르는 일을 즐겁다고 생각했던 적이, 그리 많지 않았던 듯합니다. 오히려 혼이 나면서도 어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들을 일부러 따라하곤 했었지요. 너무 흔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불어, 날 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허락된 것들에 그리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못된 버릇 때문인지도 모르고요. 어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난 이즈음에서야, 동요가 마음에 편안함을 더하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어서일까요? 아니면 그저 돌아가고 싶은 욕심 때문일까요?

    “흰 눈이 자욱하게 내리던 그 날/ 아버지와 뒤 산길 외가 가던 날/ 아름드리나무 뒤에 뭐가 나올까/ 아버지 두 손을 꼭 잡았어요/ 흰 눈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는 언덕길을/ 쭈르르 외가 가던 날/ 앞치마에 손을 닦던 우리 어머니/ 달려가 반가이 꼭 안았어요

    어머니와 떨어져 외가로 향하는 아이의 마음을, 시인은 마치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글로 옮겨냈습니다. 많은 동요들이 그렇습니다만, 맛깔은 말 외에 군더더기로 느껴질 만큼 곡의 분위기가 청아합니다. 우리 음악사에 있어서 동요는 가곡이 대중에게 선을 보이고도 한참 뒤에서야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일제 강점기 또 한국 전쟁으로 방치됐던 아이들을 위해서, 시인과 작곡가가 뜻을 모아 시작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동요가 널리 보급되고 제대로 아이들의 입을 통해 불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기초적인 음악 문법에서 벗어나, 유려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동요를 선보이기까지도 길었지요. 작곡가 이수인은 바로 그러한 우리 동요에, 본격적인 장을 열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심 우섭 시 이 수인 곡 <외가 길> 소개해 드렸습니다<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123일 방송>

 

2.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1-18)”을 읽었습니다. 19798월 어느 날 한 아랍 소년의 안내로 양문(羊門/ 사자문과 스테반문으로도 불림) 곁에 있는 성 안나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베데스다 못엘 내려갔습니다. 온갖 오물들이 둥둥 떠 있는 볼썽사나운 그 못가에서 그 옛날 사람들이 붐볐을 그 날들을 떠올려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베데스다 못은 가끔 물이 솟아나는 간헐천으로 현대적인 과학지식으로는 설명이 되지만, 당시로써는 신비한 기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물이 솟아나면 누구든지 첫 번째로 못으로 뛰어드는 사람의 병을 깨끗이 고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그곳엔 38년이나 된 병자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병자를 찾아가셔서 뻔한 인사말을 하신 것입니다. “낫기를 원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아주 엉뚱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저를 돕는 사람이 없어서,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갔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일어나 당신의 담요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고, 그 사람은 병이 나아서 벌떡 일어나 담요를 들고 걸어 나갔다고 말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첫 번째는 38년이라는 긴 세월을 질병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병자의 질병을 가늠해 보자면 소아마비를 앓았던 사람으로 생각되는데, 의학 기술이 발전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고쳐보려고 힘쓰는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질병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체면과 질서 따위는 우습게 보는 냉정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38년을 그 못가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면, 가장 오래된 터줏대감일 텐데도 누구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있었다는 비정한 세태를 주목해 보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이 일화의 중심 주제가 되는 안식일에는 병 고침마저도 문제시 하는 비뚤어진 꼴통 계율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자는 말입니다. 비단 안식일을 잘 지켜야 한다는 조항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적 해석은 소위 근본주의자들처럼 문자적 접근의 위험성은 지금도 상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맥락적 이해는 물론 성경 전체적인 중심사상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계시록을 포함해서 신구약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종말론을 해석할 때는 더욱 더 성경의 중심점을 살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안식일에 해선 안 된다는 39가지 시행세칙을 들이민다고 하면 신앙생활이란 아무 기쁨과 감격이 없는 고통스러운 것이 될 뿐이라고 말입니다. 감격을 잃어가고 있는 오늘의 교회생활이 예서 나올 것입니다.

 

3. 숙제를 하는 인생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꾸준한 저의 묵상배달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데, 저는 먼저 한 줄을 써 놓고 보라 답합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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